이창재 원장의 프로이드 칼럼

                               2004 ~ 2023년 사이 글 

이창재 원장의

정신분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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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두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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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특성은 개인마다 매우 다르다.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심리적) 가치도  각자 참 다르다.

어떤 사람은 '정확한 앎과 공정한 관계'를 중요시하며, 어떤 사람은 ‘정서 공감과 위로’를 가장 중요시한다.

정확한 인식, 옳고 그름, 공정성(fairness)을 주목하는 사람에겐,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가 보다, 자신과 상대방이 정확한 인식을 함께 공유하고 옳고 공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고가 정서와 '분리'된 정신구조를 지닌 신경증자는 초자아가 비대하여 사회적 일과 대인관계에서 지적-도덕적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그 추구 과정에서 정서 소통은 주요 요소로 주목되지 않는다. (과도하게 간과한다) 

지적 사유 활동에 과도 몰두하는 신경증적 인격은 인생의 맛인 감정을 풍성히 느끼거나 교류하지 못하는 정서소통 무능 성향을 지닌다. 그런데 신경증 인격은 유아기에 엄마 관계에서 나름 안전하게 돌봄 받는 경험을 했기에, 성인이 되어 모성적 정서 관계 보충에 일차적 관심을 갖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이성의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능력 있는(훌륭한, 매력적인) 존재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오이디푸스기에) 자존감에 상처 입은 복잡한 무의식 감정 ․ 오이디푸스 갈등과 대면하기를 무심결에 계속 보류한다.

신경증자는 무의식에서 금지된 소망과 연관된 갈등에 종종 휘둘리지만, 강한 '억압' 방어작용 때문에 자신의 원래 소망과 감정은 늘 변형(왜곡)된다. 이런 내면의 방어(억압) 작용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유년기 감정과 직접 접촉하지 못하기에, 자기감정을 거의 모른다!  강한 앎에의 욕구를 지녀 냉철한 인식을 추구하는 그와 그녀는 복잡한 자기 욕망의 근원을 알고 싶어 하지만,  무의식에 세팅된 신경증적 심리 구조로 인해 정작 자기자신에 의해  늘 속임 당한다.  

신경증 인격은 또한 유년기 자존감 상처 회복을 ‘주지화(지적 합리화)’ 활동으로 보충하기 때문에, 타인의 정서와 직관적으로 접촉하는 원초 정신작용인 투사동일시를 좀처럼 사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소화하지 못해 골치 아픈 감정덩이를, 좀처럼 타인에게 옮기고 전염시켜 자신에 동조하게 만들지 못한다. 감정이입과 투사동일시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그 누구를 전적으로 공감해 편들거나, 전적인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한다.  

신경증자는 공정하고 꼼꼼한 지적 사고와 준엄한 초자아에 지배받는 규범행동으로 공적 사회 맥락에선 타인에게 모범되는 유익하고 존경스런 인간이다. 그런데 내밀하고 친밀한 사적 관계 차원에선 대상과의 정서 접촉이 정신구조상 방어(방해)되어 있기에, 정서 공감과 합일을 욕망하는 파트너에게는 종종 오해와 답답함을 일으킨다.

"도대체 당신의 진짜 마음이 뭐야? 진정 바라는 게 뭐야? 나를 사랑하는 거 맞아? 내 편 맞아? "


이에 비해 정서 공감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에겐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의 정확한 분별’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타자관계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우호적(내 편)인가, 내 감정을 잘 위로해주는가, 기분 좋게 해주는가이다. 그/그녀는 자신을 전정으로 위해주는 따스한 사람을 원한다. 정서적으로 좋은 느낌을 주는 대상이라야 비로소 그 대상과 연관된 무엇에 강한 관심과 긍정적 사유 활동이 작동한다.

정서 소통의 근본 모델은 어린 시절 엄마-아이 사이의 관계이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아이의 마음을 가장 가깝게 교감해주는 존재다. 그래 정서적 인간은

‘유아기 엄마’ 같은 파트너를 원하며, 엄마-유아 관계처럼 전적으로 돌봄 주고 돌봄 받는 융합된 삶을 추구한다. 상징계의 언어적 사고와 상징적 의미 분별에 미숙하거나 엄밀하지 못한 채, 정서에 민감 집착하는 이런 인격을 ‘엄마 인간’이라 칭한다. 일종의 유아성인격 요소에 고착된  엄마인간은 유아기의 ‘엄마-아이’ (2자, 정서적 친밀) 관계를 계속 반복하며 산다.

세상을 위험한 적과 안전한 아군으로 나누고, 과도 융합된 가족주의 성향을 지니며, 타자일반에 대해선 진정한 믿음을 주지 못한다. 이런 엄마인간과  인연을 맺으면, 자연스레 그의 정서 무드에 융합된 삶을 살게 된다. 이들은 비록 '말'을 사용하긴 하지만, 핵심 소통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감정덩이를 상대에게 쏘아 집어넣는 투사동일시를 사용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 정서를 척 알아주기 바래..”


부모 자식 관계, 형제 관계, 대인 관계에서 (상위의) 중요 위치에 있는 자가 엄마인간 인격일 경우, 어떤 점에서 주위 대상들과 정서적 친밀감을 지닌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나는 곧 너야. 우리는 하나야” 

어떤 면에서 그(녀)는 참 따듯한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운명의 아이러니에 의해 어느 순간 그 주위 대상에게 ‘나의 욕구’는 더 이상 나 자신의 욕구가 아니게 된다. 그들은 엄마인간의 욕망에 종속되고 전염되어 살면서 그것이 자신의 욕구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한 채, 그냥 엄마인간이 이끄는 삶을 더불어 살아가게 된다. 몇 달, 몇 년,  관계가 이어지는 그날 까지..!

엄마인간의 내면에는 엄마와 융합되어 행복했던 정서와 더불어, 엄마에게 상처입어 소화되지 못한 채 분열된 부정적 정서(수치감, 공허감, 자기 삶을 살지 못한 분노..)가 일렁인다. 그래 엄마인간은 그 정서를 자기 대신 담아주고 공감하며 소화시켜줄 제3의 대상을 원한다. 그/그녀는 유아기 엄마처럼 아기의 결핍을 금세 알아서 채워주는 자상하고 전능한 마술적 대상을 원한다. 그로인해  ‘구원’을 약속하는 달콤하고 화사한 말로 현혹하는 대상에게 속아서 상처 입는 쓰라린 경험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정한 기운으로 화려한 말을 속삭이며 위로해주는 대상이 여전히 그립다.

엄마인간이 사회적 약자일 경우, (생각과 정서가) 아이같이 미성숙한 그/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연민이 일어난다. 그런데 엄마인간이 사회적 힘을 지닌 위치에 있는 경우, 그의 주변대상들은 오직 ‘그/녀’의 정서적 충족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들러리 인생을 살게 된다.  가치 있는 무엇을 접할 할 때마다 금세 떠올려지는 힘 있고 다정하고 (유아처럼) 갑자기 화낼까봐 무서운 그 분 !

그녀의 (분열된 감정표상을 외부 대상 속에 쏘아 집어넣는) 투사동일시는 너무도 강하기에, 누구도 감히 그녀의 뜻을 거부할 수 없다. 

혹자가 그녀의 뜻을 거스릴 경우, 따스하던 그녀의 정신은 홀연 상처 입은 아이 심정, 또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아이에게 보복하는 가혹한 엄마상태로 변한다. 아울러 유아기부터 내부에 분열시켰던 부정적 감정들을 일시에(부지불식간에) 투사동일시로 그 대상에게 쏟아 넣어, 상대의 영혼을 오물로 덧씌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자의 부정적 투사동일시에 점령당하는 사람은 원 정신이  마비되고 곤혹스럽기 때문에, 부모자식, 형제관계, 직속 부하일 경우 적절한 거리두기나 정신적인 분리 독립이 불가능해진다.  

"그 분을 결코 거스를 수 없어요. 제 정신이 없어지기 때문에 ...아. 이 기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위에 언급한 인간이 온전한 사회적 관계와 친밀한 사적 관례를 위해 필요한 두 유형의 소통방법을 요약해보자. 하나는 사회적 과업 성취를 위해 필요한 '객관적 사고, 정확한 언어, 옳고 그름, 공정한 관계 에 근거하는 소통이 있다. 또하나는  개인의 실존 무드와 희노애락을 좌우하는 근원인 '정서'관계를 중시하는 소통이 있다. .

사고가 엄밀한데 정서에 둔감한 신경증자와, 정서에 민감한데 객관사고가 미숙한 엄마인간이 현실에서 만나면 그들 사이의 소통은 어찌되는가? 

 양자는 가치관과 의사소통 방식이 너무 달라서 서로 오해와 싸움을 반복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 (분쟁 커플의 상당수는 이 문제를 지닌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외적으로 동일한 시공간에 함께 있지만, 실상은 각각 전혀 다른 주관적 세계를 체험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런데 현실 속 인간들에게는 아동기에 고착된 신경증적 정신요소와 유아기에 고착된 엄마인간 요소가 다양한 비율로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위 내용은 극단적 경우에 해당한다.

만약 서로 다른 그 두 인격이 (정신분석의 도움으로) '언어적 사고'와 '비언어적 정서'를  조금씩 통합하여 서로를 조화롭게 보충하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두 인격 사이의 진정한 소통 관계를 가로막아 답답하게 만들어온 '미묘한 그것(운명의 힘, 무의식)'에 관한 심연의 수수께끼가 상당부분 풀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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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