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재 원장의 프로이드 칼럼

                               2004 ~ 2023년 사이 글 

이창재 원장의

정신분석 칼럼


  2004~2023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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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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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조차 타인에게 계속 피해 주면서 자신의 문제를 외면하며 사는 사람을 일상에서 접할 때면, '사회적 나이, 지위'가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든다.


 인간이란 엄마몸에서 갑자기 '분리'되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불안, 상처에 노출되는 존재다.

 개인을 에워싼 타자들이 전하는 수많은 자극들 

 그 어떤 존재도 살아가는 한 원치않는 (외적-내적) 자극들의 침범에서 전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생명체들은 뜻밖의 고통 자극들을 일상에서 견디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미성숙한 어린 아이의 경우 '자아'가 약하고 미성숙했기에 고통 자극을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적다.  특히 자신이 의지해야 하는 '대상'이나 '환경'으로부터 오는 부정적 자극들일수록, 그것을 계속 '감당'하기는 너무도 힘이 든다.  그래서 아이는 정신을 '좋은 자극을 담는 영역/나쁜 자극을 담는 영역'으로 분열시키고, '전적으로 좋은 대상/전적으로 나쁜 대상'으로 편집-분열된 환상을 만들어내, 과도한 부정적 자극들로 인해 '정신이 깨지는 불안'에서 벗어난다. 

 

'좋은 환상'은 늘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데로 나의 정신을 위로해주며, '나쁜 환상'은 비록 날 박해하지만 외부로 '투사'되어 '남 탓'을 할 수 있게 하므로, 나를 책임과 문제 직면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이처럼 (편집되고 분열된) '환상'은 자아가 미성숙한 시기의 인간을 고통자극들에 대처하게 해주는 긍정적 방어기능을 한다.  

힘든 환경에서 지낸 아이일수록, 그의 정신은 비현실적 환상과 환각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 아이가 자라 생물학적 어른이 되면 어찌되는 걸까? 

복합 요소들로 구성된 현실과 냉엄한 평가 시선들로 얽혀있는 경쟁 사회에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고통스런 현실을 '환상'으로 버텨온 아이가 '사춘기'에 새로운 긍정적 현실 대상이나 환경을 접촉해 내면화할 경우, 환상에 의존하던 기존의 분열된 정신성향은 보다 통합된 자아구조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사춘기'에조차 유년기와 유사한 힘든 환경이 반복될 경우, 무의식에 자리한 유아적 환상들은 정신의 (중심 내적대상) '중심 구조'로 자리잡아, 평생 환상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현실의 것들은 너무 실망스럽고 역겹고 불안해!"


 그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높은 지능이나 학위, 자격증을 지닐 지라도, 일단 무의식에 '구조화'된 환상은 좀처럼 개인의 의지로 변형되거나 해체되지 않는다.  무의식은 무시간성을 지녔기에, 나이를 먹지 않아,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정신분석의 진실'은 때로 너무 냉정하다.


성숙인과 병자(성격장애자)의 차이는 어찌보면 단순하다.

병자는 자신이 환상에 갇혀 있음을 정말로 죽어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복잡하게 느껴지는 '현실'은 불안 때문에 회피되거나 감당하기 편한 모습으로 자동 '편집-왜곡'된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주지 않는 한....

유아기 불안 공포가 내부에서 역동하기 때문에 유일하게 의존해온 자기 '무의식의 환상'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유일한 의존 대상인 '그것'을 잃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


냉엄한 현실원칙과 가혹한 도덕 평가의 칼날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트라우마-공포를 체험했거나 '분열된 분노와 파괴

욕동'이 깊은 개인에게, 안전히 의존-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환상' 뿐으로 느껴진다. 그래서....무의식의 환상은 결

코 '의지'로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정하기 쉽지 않은 (분열된) 자기 정신의 불완전함, 무기력함, 수치감!

자신이 상처와 불안이 깊은 힘없고 가엾은 존재였다는 걸 인정하고 위로하며

타인과의 진지한 대화를 시도할 줄 아는 사람은 설령 어떤 증상에 시달릴 지라도 '성숙한' 존재다. 

고통의 늪이 깊고 험할 수록, 그것을 헤처 나온 그(녀)는 인류의 모범인 위인이 될 수도 있다. 


'무의식'은 주체가 '그것'을 자유롭게 (비형식적, 자유연상) 언어로 표현하고 스스로 대면 대결 자각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그 구조가 변화한다. 

그런데 무의식을 드러내는게 정신의 성장을 돕는다고 믿어지는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지 않으면 결코 자체를 개

방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을 '인정'하는 그 만큼만 타인과의 진정한(비환상적) 소통이 가능해져,  변화의 계기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그 '소통'의 힘으로 (무의식의) '그'는 본연의 '나'를 되찾거나 바꿀 수도 있고, 타자를 향해 자신이 축적해온 좋은 기운을 순환시킬 수도 있다.


내면의 상처들이 노출되는 순간....그를 하찮게 여기고 놀리며 매장하던 일방적인 환경은....

'정신분석'이 인간내면의 실상을 이 세상에 전한 이후부터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자료'들을 통해 '강함-약함'이 단순히 '의식의 기준'으로 판단될 수 없는 것임을 인류에게 절감시켜 

왔다.


자신이 '문제 많은' 존재라는 걸 자연스레 대면하지 못한 채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 주위 사람에게 자신의 병리성을 흩뿌려 그들을 자신과 동일한 병자로 만든 후에도,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며 정신분석을 적대시하고 비난하는 대상들을 사회 생활에서 접할 때면


"유아적 환상과 불안의 힘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그것'의 뿌리를 '직면'하는데 도대체 몇 겁의 세월이 필요한 것일까?

그 환상과 불안은 도대체 몇 x 대를 걸쳐 내려온 유물이며, 

몇 x 대 자손들을 병리성에 물들게 만들 것인가?


자신의 진면목(무의식)을 결코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에게, 정신분석은 과연 무엇을 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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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