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재 원장의 프로이드 칼럼

                               2004 ~ 2023년 사이 글 

이창재 원장의

정신분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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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자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들.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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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는 자식보다, 선생은 학생보다, 정치경제 지도자는 일반대중보다...위대한 존재이시다." - 유교

"나이 많은 인간은 적은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우월하다. 따라서 연장자를 대할 때는 눈을 내리깔고 공손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 규칙을 어기는 자는 엄히 매질해 다스려야 한다. 무릇 연장자 일반은 부모와 형의 대리자다."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똑똑하면 불행해진다. 여필종부 ! " 

"왜놈과 빨갱이는 민족의 원수다. 절대 믿거나 가까이 해선 안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사회를 망치는 이방인이다. "-분단냉전 시대

" 00 교주님 말씀을 믿지 않는 모든 존재는,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하며 영원한 죄의 심판을 받게 된다." -죽음불안-독재 시대

" 일 못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밥벌레,  쓰레기다." - 개발도상국가 시대 대타자 말씀

" 너희는 무조건 내 말만 들으면 되.  세상에 누구도 믿어선 안되 ~ " - 성격장애 부모, 지도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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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된 과거시절 이미 정신에 내재화되 '나'인양 착각되고 내 삶의 주인처럼 군림하는 구시대(비현실)적 대타자 굴레

에서 어찌해야 벗어날 수 있는가? 


'정신분석 작업'의 위력은 주체의 기존 가치관-생활태도가 현실과 충돌해, 정신에 심각한 불균형이 생겨, 자신과 자신

의 뿌리인 대타자의 진리성-효용성에 대해 근원적 의심과 물음을 던지는  상황에서 출현한다. 

"대체 나는 왜 적성에 맞지 않고 변화된 현실에 부적합한,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반복하고 있는가?

 대체 누가(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삶을 반복하게 만든 것인가?"

컴컴한 무의식 속 대타자에 대한 세세하고 격동적인 대면 작업이 진행되어야 비로소 그에겐 기존 대타자

의 늪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회복하고 재구성하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길은, '대타자 위치'에 있는 현실 대상에게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건강한 기운을 꾸준히 제공해, 대타자의 결

여와 병리적 성격구조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대타자의 정신이 건강해져야 그를 내사하지 않을 수 없는 구성원

들의 정신성이 비로소 긍정적으로 발달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일견 화목하고 감동적이고 거룩하게 보인다. 그런데 권위숭배 전통을 지닌 우리나라 가족의 경우, 대타자 위치

는 보편적으로 부모나 장남이 차지해 왔다. 그로인해 자식이나 동생들이 권위자인 부모나 장남의 정신성을 변화시킨다

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타자 자신의 병리적 정신구조는, 자신의 ‘어릴 적 부모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새로운 이상화 대

상 관계체험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나이에 의거한 위계 서열을 지닌 한국의 문화구조에선 후배

가 선배에게, 동생이 형에게 이상화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기에, 대타자의 정신적 결함을 주위사람이 변화시키려는 시도

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개인의 성격과 정신구조는 본인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구가 깊고 강하지 않는 한 아무리 외부에서 좋

은 기운을 제공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가족 내 대타자가 인격구조의 결함을 지닌 경우,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 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부인') 나아가 자신의 나약한 면이 노출되어 비난, 수치 당할까봐 두렵고, 오랜기

간 내면에 함께하던 장단점을 지닌 '내적대상'을 떠내 보내면 정신이 허전하고 자기가 없어질까봐 두렵다. 아울러 방치되

어 고립되었던 과거 상처를 다시 겪을까봐 공포스럽다. 따라서  자기의 현재 상태를 바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방어한

다.('격노'와 회피)  


대타자 피해를 벗어나는 또다른 길은 병리적인 그를 '대타자의 위치'에서 끌어내고 좋은 정신성을 지닌 다른 대상을 대타

자 위치에 앉히는 것이다. 일견 냉정해 보이는 이 길은 현실에서 성공 가능한가? 이것 역시 매우 어렵다. 가족구성원에

게 그 대타자를 부정함은 곧 (내면에 자리 잡은 그/녀 자신의 인격)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 같이 느껴져, 강한 불안과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의 불행한 위기 사태를 통해 가족의 병리성이 부인하기 힘들 정도로 외부에 거듭 노출될 때, 구성원들이 그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그 뿌리가 대타자의 오래된 결함에 기인함을 뼈저리게 성찰할 경우 예외적 가능성이 생긴다. 그 

경우에 집단구성원이 정신을 모아 새로운 삶의 규칙을 상호주체적으로 제정한다면, 기존 대타자의 병리적 기운으로부터

의 '분리, 독립'에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병리적 대타자에 길들여진 직계가족이나 융합성향이 강한 형제의 경우는, 이미 내면에 그 대타자가 내

적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대타자와 유사한 정신 '구조'가 형성된다. 그로인해  객관적인 '자기반성' 활동과 진정한 

'분리 독립'이 매우 어렵다.


'대타자의 위치'란 신체 공간적 특성이 아니라 '마음의 권위 자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병리적 대상에게 '대타자 역할'을 

할 '자리'(제사의 제주, 권위 있게 '말'하는 자리...)를 현실에서 더 이상 제공하지 않는다면, 부작용이 완화될 수 있다. 

병리적 대타자에게 엄격한 금지 규칙을 적용하여, 병리성을 전파하거나 반복 재연하는 '위치'를 현실에서 제공하지 않는

다면, '나'와 집단 구성원들이 오랜 오염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성을 회복, 보충, 발현'하는데 아직 희망은 있다. 


(2010 무렵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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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