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재 원장의 프로이드 칼럼

                               2004 ~ 2023년 사이 글 

이창재 원장의

정신분석 칼럼


  2004~2023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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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아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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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 할 것들은 이제 다 안 것 같습니다 ~”

 

주목받는 전문 직업을 가졌을 지라도 개개인마다 자신모르는 '심연의 무엇'이 있다. 

감당하기 힘든 자극으로 인한 상처, 불안, 그때 그 좌절된 욕구에 대한 불만과 결핍,

태어날 때부터 형제자매보다 관심 받지 못한 수치심, 억울함, 증오가 있다.

불안, 상처, 증오, 수치심으로 마음이 불편해져 사람을 피하며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

현실생활에 부적절한 불안, 부정적 감정, 망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과거사와 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어느 시절 어떤 상황에서 형성된 내가 감당할 수 없던 ‘그것이 무의식에 자

리’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의 정신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정신분석가는 개개인의 과거에 대해 좀처럼 잘했다/못

했다 ‘평가’하지 않는다. 

단지 부정적 상태가 반복되어 삶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삶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그 기회를 붙잡을지 흘려보낼 지는 ‘그 개인의 자율성 몫’이다.  

 

극좌/극우파, 시민운동가, 윤리교육자, 종교가...들은 자신의 가치기준에 어긋나는 사람들에 대해 냉혹한 선/악 평가와 인

격적 비난을 하곤 한다. 이에 비해 의식 이면의 ‘무의식의 특성’을 연구 • 탐색 • 대결해온 정신분석가는, 의식세계의 가치

기준과 평가들에 덜 억 매인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 ‘개새끼, 쓰레기, 악마...’로 격하게 비난받는 언론에 오르내리는 범죄자들에 대해서조차, ‘존재 평

가’ 하기 보다 그가 어떤 심리적 요인들로 인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다중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다. 

 

어떤 사람의 내면에 온갖 파괴욕동, 부정적 감정, 반사회적 생각들이 들끓는다 해도, 타인과 사회에 심각한 상처나 피해

를 ‘실재로’ 주지 않는 한, 그의 인격에 대해 좀처럼 ‘도덕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 평가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병리적 정신구조와 증상들을 변형시켜 정신기능과 욕망을 회복시키려는 치유 목적을 지니기에, 분석가는 자신과 타인

의 정신형성과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인격 요소 내지 행위에 대해 ‘병리적’이라는 부정적 평가판단을 한다.  

 

인간은 출생 순간부터 원초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발달’해가려는 타고난 잠재력(본성)을 지닌다. 그 발달 운동을 좌절

시키는 어떤 자극과 행동, 관계 흔적, 타자의 욕망은,  ‘무의식에로 들어가 평생 동안’ 삶을 온전히 발현시키지 못하게 방

해하는 집요한 이물질(에어리언) 기능을  한다. 그것이 인생 행로에 너무도 집요한 악영향을 미처 비극을 만들어냄을 수

없이 확인해왔기에, 정신의 형성과 발달에 손상을 주는 모든 관계와 부정적 요소들에 대해 ‘병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다. 

 

분석가는 어떤 사람이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에 깊은 상처를 지녀, 타인과의 친밀 관계를 불편해하는 정신성을 지니게 

된 경우, 그로인해 인간관계가 너무도 미숙해 어떤 결실도 이루기 힘든 상태에 처했을 경우, 그것 자체에 대해, 그것만 가

지고는, 결코 ‘정신 환자’라는 진단-평가를 하지 않는다.  

 

인간에겐 내면의 부정적 감정, 불안, 상처와 연관된 병리적(방어적, 미숙한) 인격 부분이 있는 데 비해, 사회와 타인과 더

불어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건강한 인격조직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내면이 여러 불안과 망상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그가 타인에게 좋음을 주는 어떤 정신성을 개발해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할 경우, 그의 인격을 병리성 진단언어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큰 문제는 개인무의식에 잠재된 미숙한 인격부분이, 불안이, 상처가, 자아에 의해 온전히 대면되는 과정

을 거치지 못한 채, 그가 어느 순간 세상의 중요 위치에서 활동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 때 의식이 책임져야 할 중요 역할(전문직업인, 엄마, 아버지, 집단 리더, 선생...)과 무의식(해소 못한 유아적 불안, 상

처, 부정적 감정) 사이의 괴리가 갑자기 심해지기 때문이다.  실수, 사건 사고, 증상 상당 부분은 이 때 발생한다.

 "종교가, 교수, 의사, 법조인, 정치가, 박사..  신분으로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가 있어요 ~"

 "아, 나도 모르게 !  '내'가 한 게 아니에요 ~ " 

 

자신의 무의식(‘망각-외면된 나’)을 ‘대면’하는 경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꽤 많다. 

의식에 이질적인 그것을 대면하는 것이 죽도록 싫고 불편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회피하고 살아온 인간들이 꽤 많다. 그

로인해 무의식은 더더욱 비대해지고, 의식에 대한 반발이 심해져, 정신의 균형이 갑자기 교란되거나, 정체 모를 무드에 

빠지게 되고, 불편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려 버둥대다 무심결에 뜻밖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과거엔 별 문제가 아니던 것이, 그가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순간부터는, 평생에 영향을 미칠 큰 문제로 부각되는 상

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무의식 사이가 크게 괴리되면서 일어나는 정신율동의 전형적 패턴이다. 

 

과거엔 칭송 받던 인물이 어느 순간 국가적으로 비난받는 쓰레기로 추락하고, 종교계, 학계, 정치계, 문화계 유명 인물들

의 추락하는 사건 사고 에피소드들이 끊임없이 언론에 보도된다.  그리고 거기에 오줌똥 갈기듯이 경멸하는 냉혹한 비난 

평가들이 벌레 떼처럼 쏟아진다. 이것이 과연 단지 그 대상만의 문제일 뿐인가? 

 

주목할 점은, 21세기에 상영되는 (오이디푸스 왕의 인생 과정과 유사한) 행복과 비극, 성공과 추락 드라마가, 어떤 피하

기 힘든 무의식의 힘에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 창시자 Freud가 인류에게 준 새로운 에너지 선물은 "너 자신의 무의식을 보라"이다. 

이것이 실행되면, 인류의 정신성과 인간을 보는 눈,  사회 문화의 질감이 확연히 바뀌게 된다.

원초 불안, 상처, 부정적 감정들이 부드럽게 변형되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괴리가 줄어들어 우발적 충동과 사건 사고

가 줄어들고, 타인에 대한 평가가 유연해지고, 인간관계와 소통의 질이 풍성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상상 속의 이상적 그림일 뿐이다.  태초부터 인류의 무의식에 자리한 콤플랙스, 공포, 상처, 부정적 감정들의 

위력은 거대하기에, 압도당할까봐 두려워 자신의 '그것'을 대면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래 무의식

을 모르면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함을 확신하듯 가르치고, 상담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인물들이 매스컴에 화사하게 

등장한다.   

 

그의 생각과 주장, 설교, 교육, 저술, 정책, 그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의식과 무의식이 타협하여 생성된 것이건만, 대다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부분만 지각하고 표현하기 원할 뿐이다. 자신의 미숙함, 불안, 상처, 어두운 부분

을 결코 지각하거나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그것'에 접속하려할 경우, 기겁 하거나, 독기를 내뿜거나, 욕을 해대며 공격하거나 회피한다. ‘무의

식’을 떠올리거나 대면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관계를, 이런저런 이유들을 대며 차단하며 지낸다. 

 

이런 인간이 누구를 가르치거나, 언론에 주목 받거나, 책을 내거나, 중요 위치에 오르게 되면 어찌되는가?  그에게

서 나온 온갖 것들(기운, 표정, 태도, 몸짓, 말, 작품, 정책...)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선전 매체에 현혹된 영혼들에게 곧

바로 접속 침투 내사된다.

 

그것들 속에는 진솔하게 표현되지 못한 '위장된 무의식의 기표'들이 섞여 있다. 결핍이 심한 사람일수록 그것을 알아보

지 못한 채,  유명인의 그것을 그대로 내면에 흡입하게 된다.    세상은 무의식의 미숙함을 최대한 감춘, 의식의 현란한 언

어, 이미지, 환상들의 파노라마로 가득한 쑈 무대가 된다. 

 

과시욕에 들뜬 그는 자신의 ‘무의식’- 부정적 감정, 콤플렉스- 을 외면한 채,  '그것'들에 의해 자신의 의식지각과

사유와 행동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르는 채, 세상 무대에 출현한다.  그리고는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세상이

어떻고, 인류 역사가 어떠하며 어떠해야 한다는 화사한 ‘거대담론’과 사회적 얼굴 표정을 방송 카메라를 향해 보여준

다. 자신의 진면목을 외면 회피하고 '관념적 지식의 은신처'에 거주하며, 조적방어와 전능망상에 사로잡힌 그는 이 시대 

전형적인 지식연기자다.

 

"광대한 사유 세계 속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전망대와 고성능 눈을 지닌 거대한 관찰자이니, 모두 내 말을 열

심히 경청 하거라 ~":

 

자기무의식을 모르는 인물의 내면에서 나온 현란한 언어들. 위대하고 매혹적인 생각들.

그것에 눈과 귀와 영혼이 접속되는 순간, 그것에  도취(전염)되어, 힘 있어 보이는 타자(메스컴 속 유명인)가 제공하는 생

각과 욕망을 자신의 생각과 욕망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모방(‘as-if’) 인격‘이 대량 생성된다. 

"그 분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니, 나 또한 유명한 그 분처럼 대단한 존재이시다 ~"

 

그런데 사고되지 못한 심연의 진실을 밝히는 ‘무의식’의 학문인 정신분석학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무의식’을 모르는 

사람이 ‘인간 일반’에 대한 학문적, 치료적 가르침을 권위 있게 전하는 쑈는, 21세기엔 더 이상 성공하기 어렵다.  

 

필요한 정보가 핸드폰으로 즉각 접속되어 불편을 즉시 해소해주는 오늘날, 진정한 정신적 권위와 충만한 구원 에너지

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자동 방어에 의해 차단되어 결코 정보화되지 않는 운명으로 자리 잡은 ‘무의식의 욕동들, 환상, 상처. 불안,

금지된 생각들, 부정적 감정 덩어리들을 집요하게 뿌리까지 대면. 대결해 소화해낸 '제3 인간'에게서 나오게 될 것이다.

 

현대의 지성인들은 흄/니체/맑스/프로이트/비트겐슈타인/푸코.., 노자-장자, 나가르주나...가 개척해낸  '존재의 심연' 성찰

결실로, '언어적 사유가 지닌 한계'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 작업을 거친 고도 상징화된 시대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니체 : "언어적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사실 • 사물 자체와 매우 다른 것이니, 결코  언어에 현혹되지 마라."


Freud : " 청취된 언어와 영상 내용을 사실처럼 • 사물처럼 지각하고 그대로 믿고 정신이 곧바로 좌우되는 사람은, 자아 

경계(Ego boundary)가 얇고 반성능력이 결여된 심각한 인격미발달자다."


계보학 : "감미롭게 속삭이는 언어의 표면 의미보다, (어떤 정신 상태를 지닌) '누가' 그 말을 뱉고 있는지 주목하세요."


현대 사상계의 이런 첨단 메시지들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의식 배후에 위치하는 ‘무의식’이 나의 사유 활동과 

존재 무드에 어떤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치열하게 탐색해 대면 대결해야 하는 과제 앞에서, 

현대인 다수는 '눈 뜬 장님처럼' 멀뚱히 주 춤 거 린 다. 

 

 "젠장. 방송에 나오는 화사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왜 구지 일일이 확인해야 하니. 귀찮게 ..

그냥 듣기 좋고 보기 좋으면 그걸로 족한 거 아닌가 ?  인생이 별거 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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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