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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조언

관리자
2020-02-15

 

*대학신문. <형지상학> 원고분량 26.2매


영웅과 통과의례


청년기는 무의식에 억압된 어린 시절의 욕구, 결핍, 상처, 불안이 의식에로 회귀하여 해소-보상-보충-위로해달라고 요구하는 시기다. 아울러 타자들로 구성된 사회(상징계)가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해 특정한 방향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무의식들은 의식에 직접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다. ‘무의식의 요구’는 삶의 위기감이나 불안, 무기력감, 격렬한 정서 등 어떤 무드로 전해지며, 청년기의 원인모를 방황은 바로 의식의 목표와 무의식의 요구 사이의 갈등에 기인한다.


영웅의 필요충분조건

영웅이란 어떤 결함으로 인해 집단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무의식의 그 결함을 치유하는 비범한 지혜와 힘을 제공하여 집단을 회복시키는 존재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신화 속 영웅들은 부모(사회) 또는 부모 중 한쪽(사회의 주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이 상처를 보상하지 못하거나 대면하여 극복하지 못할 경우 영원히 불행해지게 된다. 그들은 유년기의 결핍을 보충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어릴 적부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런 과정에서 자아 기능이 유독 활성화되고,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과 고달픈 시련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혹독한 청년기를 통과하는 미래의 영웅[이하 청년기 영웅]이 대면하고 풀어야 할 ‘과제’는 다음의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다. 첫째, 기구한 삶을 살았던 그의 부모가 자식의 정신에 남긴 무의식적 욕망 흔적. 둘째, 그가 속한 집단이나 그 집단의 권위자들이 암암리에 고통받아온 어떤 오래된 문제. 청년기 영웅에게는 과거의 타자들이 방치하고 회피해온 문제를 용기 있게 대면하고 해결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내면화된 타자(부모)의 결핍을 해소시키고, 고통의 굴레에서 집단을 해방시키라는 무언의 압력이자 과제다.

문제는 가족과 사회, 민족으로 대변되는 타자의 문제가 나 자신의 문제와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타자의 요구와 욕망은 상징계의 작용을 통해 이미 개개인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집단의 문제를 풀어나가려면 자기 안의 ‘또다른 나’, ‘중요한 타자가 남긴 흔적’을 –생존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대면하고 그와 대결해본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성장의 동인: 조력자와 통과의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단 형성된 정신구조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불안을 해소해주는 방어기제에 의해 보호를 받는 동시에 그것에 갇혀 있으며, 이미 형성된 정신의 방어기제를 자신의 의지로 벗어날 수 없다. 청년기 영웅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청년기 영웅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해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힘을 지닌 타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는다. 그 타자는 삶의 보편적인 문제를 영웅 자신보다 먼저, 혹독히 겪은 자요 인간의 본질과 바람직한 미래의 방향에 관해 심오한 답을 깨달은 자다. 그러한 ‘조력자’는 청년기 영웅을, 주목받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에서 집단을 구원하는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로 변모하게 만드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 ‘조력자’와 더불어 청년기 영웅을 성장시키는 또다른 동인이 있다. 바로 그에게 주어지는 유별난 ‘통과의례’다.


주몽, 순, 오쿠니누시, 테세우스의 사례

그렇다면 보통사람이 영웅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한국의 주몽, 중국의 순, 일본의 오쿠니누시, 그리스의 테세우스를 통해 살펴보자.

첫째, 보통의 인생과정을 무던히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영웅이 되지 않는다. 미래에 영웅이 될 가능성을 지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영웅의 길’을 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특수한 삶이 펼쳐진다. 청년기 영웅은 언제나 태생적․돌발적 계기를 겪게 되며,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함께 자라온 낯익은 사람들과 더불어 편안히 살아갈 수 없다.

주몽과 오쿠니누시는 왕위 경쟁을 하는 형들의 위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난다.


청년기에 이르자, 형제들과 신하들은 왕에게 주몽이 왕권을 위협할 위험한 존재이니 제거해달라며 강하게 요구한다.


형들은 오호나무치[오쿠니누시]에게 자기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게 하는 등 잔인한 행동을 한다. 큰 포대를 힘들게 짊어진 그는 형들에게 뒤처진다.

_『신화와 정신분석』


태어날 때 어머니를 잃은 순은 계모와 이복동생, 아버지의 박해에 못 견뎌 가족을 떠난다.


아버지는 계모와 이복동생의 말만 믿고 매일 순을 때렸다. 효심 깊은 순은 반항하지 않고 참았다. 너무 심하게 맞을 때는 속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곤 했다.

그리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아버지’가 있음을 자각하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고향을 떠난다.


테세우스는 아버지 없이 외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어머니와 함께 지낸다. […] 성장해 청년이 된 테세우스는 큰 바위를 들어올리고 아이게우스의 징표인 검과 신발을 찾아 아테네로 간다.


둘째, 모험적인 인생을 선택한 결과 청년기 영웅은 고된 경험을 하게 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주몽은 새로 거주하게 된 지역에서 기성 권력자들로부터 세 차례의 결투를 요구받고, 오쿠니누시는 지하계 권력자가 부과한 혹독한 시험을 거치면서 목숨의 위협을 세 번 넘긴다. 순은 이복동생과 계모의 농간으로 죽음의 위기에 세 번 처하고, 테세우스는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한 미궁에 갇힌다.


아버지는 순에게 곡식창고의 지붕이 망가졌으니 수리해달라고 요구했다. ……순이 지붕에 오르자 아버지는 밑에서 창고에 불을 질렀다. ……아버지는 순에게 우물 바닥을 청소해달라고 요구한다. ……순이 우물 밑으로 내려가 작업하는데 위에서 벽돌과 흙이 쏟아져 우물을 메운다. ……순의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순을 취하게 만들어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셋째, 위기의 순간에 뜻밖의 조력자가 나타나 도움을 주며, 그가 전해준 비범한 에너지를 흡수하여 역경을 극복해낸다. 주몽에겐 세 부하가, 순과 오쿠니누시와 테세우스에게는 비범한 여인이 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힘과 지혜를 제공한다. 조력자와의 만남 없이는 그 누구도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인격으로 성장할 수 없다. 그 조력자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자각하는 것 또한 험한 시행착오를 수없이 거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스사노오는 [오쿠니누시에게]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방에서 자라”고 요구한다. [오쿠니누스의 연인인] 스세리비메는 오호나무치[오쿠니누시]에게 뱀의 지느러미를 건네주며 “뱀이 물려고 들면 지느러미를 세 번 흔들어 쫓으라”고 알려준다.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희생제물로 온 테세우스를 보자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테세우스에게 미궁 속 괴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붉은 실뭉치를 준다. 실을 풀며 미궁으로 들어간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찾아내 살해한 후 실을 따라 미로에서 탈출한다.


넷째, 혹독한 역경을 하나하나 통과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개인의 정신성에 거대한 변화가 생긴다. 자아의 능력과 정신의 틀이 비약적으로 확장되고, 조력자에게 얻은 보물의 힘으로 기존 사회의 만성적 문제를 거뜬히 해결하며, 집단을 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서자 주몽은 세 번의 시합을 거친 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형제 서열이 낮아 천대받던 오쿠니누시는 폭압적인 형들을 제압하고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다. 가족들에게 박해받던 순은 왕으로 등극해 백성을 돌보는 어진 보호자가 되고, 아비 없는 아이로 놀림 받던 소년 테세우스는 왕으로 추대되어 신분보다 능력을 존중하는 민주제도를 그리스에 정착시킨다.


순은 음악을 좋아해 악곡을 짓게 하고 거문고를 개량했고, 선정을 베풀어 태평시대를 구현하였다.


왕이 된 테세우스는 아티카 지방의 많은 부락을 흡수해 아테네를 그 중심으로 만들었다. 민주적인 시민 자치제도를 만들고, 인신공희 관습을 없앴으며, 문화를 발전시켜 이상적인 통치자로 명성을 얻었다.


영웅이 성취한 과업은 여러 층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개인의 층위에서, 영웅의 과업은 개인 무의식의 문제(신경증 증상, 성격 결함) 극복과 잠재된 개성의 온전한 발현을 의미한다. 또한 영웅이 속한 민족이 오랜 세월 회피해온 민족의 부정적 요소(그림자, 콤플렉스)를 자아의식에 통합하여 민족의 정신을 새롭게 발달시킨다는 의미도 된다. 사회적 층위에서, 그것은 오랫동안 사회를 괴롭혀온 난제와 대결해 재난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인류사적 층위에서, 영웅의 과업은 당대 인류정신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인류의 정신성을 새로운 단계로 고양시킨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영웅의 최후

신화는 영웅의 최후 모습을 명료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집단은 영웅의 위대한 힘과 업적만 기억하고 싶어 할 뿐 최후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집단을 위해 혼신의 에너지를 쏟았던 영웅들의 마지막은 어떠할까.

영웅은 자신이 기성 권력자(부정적 아버지상)를 제거했듯 후대 영웅(아들)에게 거세당함으로써 아버지의 운명에 동참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화해한다. 그런 화해 속에서 세대를 이어가는 집단정신이 생겨나고 세대 간의 조화로운 통합이 이루어진다. 영웅은 결국 집단을 위해 죽음으로써 집단정신 속에 영원한 부활의 모델이 된다. 그것이 하나의 집단, 사회가 요구하는 영웅의 역할이다.


이창재

프로이트정신분석연구소장

『신화와 정신분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