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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통과의례

관리자
2020-02-15

 

<영웅의 통과의례> [젊은이에게 전하는 에세이]


프로이드정신분석연구소장  이창재


‘영웅’이란 민족이나 집단이 잠재된 결함으로 인해 뜻밖의 위기에 처했을 때, 결함을 치유하는 비범한 지혜와 힘을 제공하여 집단을 회복ㆍ발전시킨 존재를 의미한다. 그런데 당대 사회의 누구도 갖지 못한 그 비범한 지혜와 힘을 그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획득한 것일까? 삶의 목표 정립과 원하는 직업 획득에 있어 곤경을 겪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아내어 자신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는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대면하게 되는 보편 문제를 직접 혹독히 겪은 후에, 우리를 위해 바람직한 미래 방향에 관해 심오한 답을 제공하는 현자를 오늘날 청년들은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보물 같은 그 대상은 놀랍게도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늘 접할 수 있는 ‘신화’ 속에 존재한다.

전 세계 영웅 신화 속에는 그 민족이 어떤 원인으로 뜻밖의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그 곤경과 위기를 영웅이 나타나 어떻게 해결해 주었는지에 대해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대의 각 민족이 깨달은 최상의 지혜를 담고 있는 그 상징을 오늘의 우리가 소화해낸 지혜로 풀어내어 현실에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영웅’이 될 수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 행운을 과연 누가 선점할 것인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대 영웅 신화의 상징의미는 과학적 두뇌를 지닌 현대인에겐 ‘접속과 연결’이 차단되어 있다. 그것에 접속하려면 원시상태에서 문명 상태에로 ‘인간정신성의 성장 과정과 무의식을 탐구해온 정신분석학의 매개’를 거쳐야 한다. 필자가 저술한 세계 영웅신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의미 해석서 『신화와 정신분석』을 차근히 읽어낸 독자에게도 그 지혜에 접속하는 행운이 올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용하기 위해, 고대 신화 속 영웅들의 정신성을 정신분석학의 눈으로 잠시 음미해보자. 인류사에 출현한 각 민족의 생명과 정신성을 유지-발전시켜온 ‘영웅들의 정신성’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인가? 신화를 차근히 들여다보면, 그 해답이 신화 속에 다 담겨있다. 주목받지 못하던 나약한 어떤 인간이 민족을 구원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로 전환된 가장 큰 원인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해 그에게 유별난 ‘통과의례’와 ‘조력자’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몽, 중국의 순, 일본의 오쿠니누시, 그리스의 테세우스를 통해, 영웅들의 인생을 비교하면서, 보통사람이 영웅으로 변환되는 과정과 원인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보통의 인생과정을 무던히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영웅이 되지 못한다. 미래에 영웅이 될 가능성을 지니는 사람에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영웅의 길’을 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특이한 삶이 펼쳐진다, 가령, 그에겐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편안히 살아가는 일상 패턴이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든 타자의 요구나 돌발 사태가 발생한다.

주몽과 오쿠니누시는 왕위 경쟁 위치에 있던 형들의 위협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어,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나게 된다. 순은 계모와 이복동생과 아버지의 박해에 못 견뎌 가족을 떠나며,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아버지’가 있음을 자각하곤 ‘그’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고향을 떠난다. 이들 모두, 자신이 살던 곳에서 함께 자라온 낯익은 사람들과 더불어 편안히 살 수 없는 태생적인 동시에 돌발적인 계기를 청년기에 겪는다.

둘째, 보통사람이 가지 않는 모험적 인생길을 선택한 결과로 청년기 영웅은 뜻밖의 힘든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고생이 너무 힘들어 바닥으로 추락하는 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주몽은 새로 거주한 지역에서 기성 권력자의 세 차례 결투 요구에 직면하고, 오쿠니누시는 지하계 권력자가 부과한 혹독한 시험을 거치는 과정에서 목숨 위기를 세 번 겪게 되고, ‘순’은 이복동생과 계모의 농간으로 세 번의 죽음 위기에 처하게 되고, 테세우스는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한 ‘미궁’에 갇히게 된다.

셋째, 위기 순간에 뜻밖의 조력자가 나타나 도움을 주며, 그 조력자가 전해준 비범한 에너지를 흡수하여 역경을 극복해낸다. 주몽에겐 세 부하가, 순과 오쿠니누시와 테세우스에게는 ‘비범한 여인’이 절명의 위기를 벗어날 지혜와 힘을 제공한다. 조력자 만남 없이는 그 누구도 결코 ‘비범한 능력’을 획득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없음이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21세기 한국 청년들은 특히 유념해야 한다.

넷째, 그 혹독한 역경을 하나하나 통과하는 바로 그 일련의 과정에서 개인의 정신성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즉, 자아의 능력과 정신의 틀이 비약적으로 확장되며, 조력자에게서 얻은 보물들의 힘을 사용하여 기존 사회의 만성적 문제를 거뜬히 해결해내고, 집단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서자 주몽은 세 번의 시합을 거쳐낸 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새나라 ‘건국’에 성공하고, 형제 서열이 낮아 천대받던 오쿠니누시는 폭압적인 형들을 제압하고 일본최초 통일국가의 왕이 되며, 보호자들에게 박해받던 순은 왕으로 등극해 백성을 박해하지 않는 어진 보호자 역할을 하고, 아비 없는 아이로 놀림 받던 소년 테세우스는 능력을 인정받는 왕으로 추대되어 신분보다 ‘능력’을 존중하는 민주제도를 그리스에 정착시킨다. 정신능력이 위축되어 있는 개체에겐 세상 대부분이 두렵고 적대적으로 지각되다가, 정신능력이 활짝 피어난 후엔, 세상이 모두 그를 칭송하게 되는 것이 인간사의 이치인 것이다.


인생은 아직 힘든 타자의 요구를 헤처나가 보지 못한 시점에서 이해하는 것과, 힘든 현실의 과제와 대면해 매듭을 짓는 경험을 해본 후에 이해되는 것이 너무도 큰 차이를 지닌다. 21세기 한국의 청년들이 위에 언급한 영웅들을 그들의 어느 발달 시점에서 만나는가에 따라, 그 대상을 지각하는 질감이 매우 다를 것이다. 만약 현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고향을 떠나는 시점 전후로 그 대상을 현실에서 만났더라면, 그들은 무던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보다 못한 매우 불안정한 대상으로 지각될 가능성도 크다. 보통사람은 반사회성 인격과 영웅 후보자를 분별할 지혜의 눈을 지니지 못해, 종종 미래의 영웅을 사회부적응자로 오인하기도 한다. 민주투표에 의해 사형당한 소크라테스나 대중의 악운을 대신 가져가는 희생양으로 선택된 예수는, 보통 인간의 분별력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엿보게 하는 대표 사례다.

영웅적 정신성의 생성과정을 정신분석의 눈으로 음미한 후에야 우리는, 자신의 동료나 후배나 윗세대 인물들을 선구적 영웅으로 식별할 수 있는 ‘눈’을 비로소 지닐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 험한 통과의례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 처한 사람이나 대중의 손가락질 받는 사람 중에서 미래의 영웅 내지 비범한 조력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온전히 주목하지 못한다. 그 개인이 지닌 미래의 잠재능력을 주목하기보다, 그가 지닌 현재 조건들에 주목하여 사람을 평가하는 습성이 크다. 인간을 눈앞의 현상 가치로만 이해하고 평가하는 이런 습성은, 우리 민족에게서 다수의 미래 영웅들이 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시키는 약한 정신성의 징후이다.

오늘날은 전 세계 인류가 과거의 시공간적 장벽을 넘어 상호 긴밀히 접촉하고 교류하고 경쟁하는 시대이다. 아마도 수많은 민족들의 ‘신화’ 속 영웅이 거친 통과의례의 의미를 심층 음미하여, 거기서 위기를 극복해내는 지혜와 에너지를 끌어내 선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민족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