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스터디 분석 후기
    상담 스터디는 김은옥 정신분석상담사의 슈퍼비전 아래 개인분석 경험 있는 일반인과 상담 전공자가 상호작용하며 자기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소모임입니다. 본 교육원에서는 더 많은 분들께 도움 드리고자 스타디에서 나온 깊이 있는 자기분석 글을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삶의 문제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4. 의존성 성격 - '사이코지만 괜찮아'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하루님)


요즘 한참 위니캇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감정이 요동치는데 빨리빨리 객관화되지 않아 힘이 듭니다. 물론 사람은, 없었던 일로는 압도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몰랐으나 있었던 일, 일어났던 일이 자각되면서 정서적 혼란이 일어납니다. 때때로 상담실을 나오자마자 부담스러운 감정을 차단하기 위해 만화를 보곤 했습니다. 만화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요. 위니캇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공상의 발단이 절대 의존기, 유아였을 때 시작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저에게 만화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사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탈출구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릴 땐 위로가 되고 방어, 보호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어른인 지금은 현실 세계와 잠재능력을 차단해버리는 캡슐같은 답답한 공간입니다. 3월부터 선생님의 강한 권유로 만화를 보는 것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만화에 빠져지내면서 언젠가 그만둘거란 생각은 했지만 끝낼 엄두를 내지못했습니다. 상담을 시작한 내내 어김없이 보았거든요. 그런데 외부세계와 외부대상에 대한 접촉부족과 백일몽에 빠져 지내는 저에게 선생님께서 평상시와 달리 강하게 만화보는 것을 끊어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저에게 만화는 나쁜 대상이었지만 그것이 훅 빠져나가니 빈껍데기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공황발작까지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환상으로도 죽을만큼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만화가 다시 미치도록 보고싶고 애달프게 그리웠습니다. 저에게 ‘만화’가 자기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외로움과 불안을 이기는 방법은 공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비유로 공상을 공중누각으로 설명해주신 적이 있는데요. 저는 살다가 문제가 발생하면(스트레스를 겪으면) format해버리려고(프로그램을 깨끗이 지우고 다시 설치하는 방법) 공상세계에 들어가곤 했어요. 깔끔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비현실감이 컸던 것 같아요. 자기위로였어요. 저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 기분좋은 생각이나 상상으로 이전의 불쾌한 자극이나 잘못을 되풀이 하지않게 될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어떤,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현실감을 갖고 문제가 생기면 하나하나 고치는 연습을 하면서 현실과 접촉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걸리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하면서 발전할 수가 있어요. 시도하고 실패하더라도 수정하고, 재시도하고, 성취하는 것으로 제 삶을 바꾸려고 합니다. 다행히 고비를 넘겨 중독에서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생동감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물론 대체로 삶이 지루하지만 뭔가를 배우면서 예전과 달리 흥분과 재미가 느껴지고 기대감이 생겨납니다.

 

 

그러던 중 위니캇 수업에서 정신발달의 지표인 혼자있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홀로 있음은 시공간적으로 혼자 있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홀로서기’라는 발달성취인데요. 사실 홀로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지지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내면화된 엄마의 심리적 지원을 받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돌봐주는 ‘마음속의 목소리’ 그것은 건강한 사랑과 양육을 제공해주는 엄마이지요. 아버지는 안전감, 틀, 한계를 뜻하는데요. 저는 아버지에게도 충분히 도움을 받지 못해서 엄마에게 지나치게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 두 분다 저를 잘 돌보지 못하고, 정확한 한계선을 가르쳐주지 못해서 저는 수동적으로 공상세계에 갇혀 지내왔던 것 같아요. 또한 과잉보호로 엄마의 과한 관심을 받으며 자랐기에 저를 위해 뭔가를 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공허해서 공상세계에서 위로를 크게 받았습니다. 더욱이 엄마의 부적절한 관심에 갇혀 자아를 발달시킬 능력도, 힘도 없었어요. 경계선이 없어서 저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의지력을 마구 쓰다가 소진되어버리거나, 의지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다보니 원래 있던 의지력이 고갈된 상태입니다.

 

홀로 있어야만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자신과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타인과 완전히 융합되고 싶은 성향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요. 자신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고유한 개성을 만들어갈 수 있고, 자의식을 회복하거나 확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행착오나 좌절을 할 때 넘어진 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도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극복 경험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극복 경험이 반복될 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고, 삶에 낙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저는 혼자 있는 지금의 이 시간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최초의 시간이라 생소하지만 제가 홀로 있을 수 있고, 혼자여도 온전하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관계속에서 아무런 충족감도 얻지 못했던지라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희망도 바라고 있습니다. 좀더 저를 인정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속에 있는 공허감을 제대로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엄마에게 삼켜버릴 듯 침범을 당하면서 저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해 함입공포에서 벗어나도록 배우자를 선택해야만 했지만 결국 저를 질식시킬 것 같은 남자를 만났었습니다. 제 무의식의 패턴때문이지요. 저는 엄마에게 과잉보호를 받고 있어서 제가 애정결핍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정서적으로 너무 먼 엄마 때문에 고통스러운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밀착말고 엄마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는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와 내가 닿아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으니까요. 어릴 적부터 엄마와 함께 있어도 혼자인 것처럼 외롭고 텅빈 느낌이었어요. 엄마는 내가 뭘 하는지 관심을 제대로 보이는 일이 없었어요. 엄마는 저한테서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해 애정을 쏟고 헌신을 하셨던 것 같아요. 얼마전 은연중에 제가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셨는지 아빠를 통해 경제적 지원을 철회하려고 하셨어요.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대면해서 편지를 보내드렸어요. 엄마의 행동으로 제가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 앞으로 내 삶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엄마에게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두 이야기를 했어요. 이러한 직면은 엄마, 부모님관계에서 힘의 균형에 변화가 시작된 것이고, 저의 분리개별화 과정에서 의미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묻어 둔 행동은 꺼내놓지 않는 한 개선될 기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제대로 엄마를 대면해보았는데요. 그 이후 자유로워지고 엄마가 덜 부담스럽고, 덜 공포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일 년 넘게 상담을 해오면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은 제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공상세계에서 큰 저항없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감정의 힘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에 엄마와 분리되지않아서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에 무지 서툴렀습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느끼지 못해서 자아는 약하고 혼란은 컸습니다. 이제야 제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있습니다. 상담과 부모교육, 스터디를 통해 좋은 감정, 나쁜감정이 무엇인지, 느껴도 되는 감정, 느껴서는 안되는 감정을 구분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한테서는 감정을 표현을 억압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감정이 조절된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감정발달로 상처를 덜 받게 되기도 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또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음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매순간의 제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 제 본래의 모습과 교감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존성 성격에 관한 스터디를 마무리하면서 제 의존성의 취약한 모습중에 하나인 공상세계에 빠져 지내왔던 모습을 정리해서 떠나보내는 애도를 해보았습니다.

 



정서적 학대를 당한 사람은 그 학대를 내면화하거나 외면화한다.(아끼님)


의존은 ‘남에게 기대는 행위’로서 자율이나 독립과 반대되지만 소속과 애착, 공생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완전한 독립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자존심을 조절하기 위해서 타인의 인정이나 공감, 사랑에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엄마와 아이의 애착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사랑받아야 온전히 삶에 적응 할 수 있는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른도 의존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의지하는 대상의 소중함을 알고 상대방이 힘들 때 자신이 받았던 대로 기꺼이 힘이 되어준다. 건강한 의존은 독립하는 과정에서 지지대 같은 것인데, 전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려서 팔, 다리부터 정신적인 의지까지 무력화시킨다면 그것은 위험한 관계이다. 자기와 타인이 독립적인 존재라는 명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전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생존을 위한 전부를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병적인 의존상태로 볼 수 있다. 의존의 정도가 지나쳐 최소한의 심리적 독립조차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다. 한 어른이 매달리고 상대를 구속하는 등 의존적 행동을 통해 누구든 자신을 보살피도록 만들고, 이 과정에서 서로 정서적, 심리적 불안을 느끼는 상황을 의미한다. 의존적 관계에 매달리는 사람은 애정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 존재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지우려고 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며, 다른 사람 뒤에 자신을 숨기며 자신이 느끼는 실존적 불안을 부정한다.

 

의존성 성격에 대한 고찰은 오랫동안 변화, 발전되어 왔다. 20세기 초에는 의존성 성격의 수동성, 무력함, 유순함 등의 특성을 도덕발달의 실패 혹은 도덕적 결함으로 간주하여 무기력한 유형 또는 의지박약으로 의존성 성격을 규정하였다. 반면, Freud와 Abraham 같은 초기 정신분석학자는 이전의 도덕적 견해에서 탈피하여 의존성 성격을 발달적 고착의 문제로 보았다. 지나친 만족이나 반대로 지나친 결핍으로 인해 구강기적 성격에 고착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어머니처럼 돌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강력한 믿음에 기인한 낙관주의때문에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직업도 갖지 않는다. Sullivan은 의존적인 사람을 ‘부적절한 성격’이라 칭하며, 지배적인 부모 밑에서 복종적인 어린아이로 자라 평생 자신의 결정을 대신해 줄 강력한 타인을 찾아 헤매는 사람으로 규정하였다. 이들의 부적절함은 과보호되었거나 통제되어 발달의 시기를 놓친 이들이 가지는 무능함인데(의사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해내지 못하는), 이러한 부적절함이 내면화(자기비난)되면,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낮은 자아개념으로 귀결된다. 이들은 타인이 이루어 놓은 계획과 의사결정의 일부분이 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다른 누군가가 모든 것을 떠맡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조차도 양보하고, 자신이 착취당하고 굴욕당하는 것을 방관한다.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지배적인 대상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크게 두려워한다. 이들은 자기주장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라면서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응석받이가 되기도하고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의존성 성격장애의 발달사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차원은 부모의 압도적인 통제인데, 이들은 복종 이외의 다른 선택을 알지 못한다. 분명한 자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항할 수 없는 강합적인 통제가 있다면 의존성 성격장애라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의존성 성격장애의 부모는 발달상 보살핌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살피는 행동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다. 아이의 분리 독립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보살피고 보호하려고 한다. 부모가 의존적인 아이와의 친밀감을 포기할 수 없거나 즐기기 때문에 아이의 독립을 방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모의 역할과 의무는 아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신경증적인 부모는 자신의 불안과 걱정으로 아이를 과잉 통제를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는 반동형성의 기제로 적개심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과잉보호를 하게된다. 과잉보호는 특정 지점에서 고착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강화된다. 부모에게 의존하였을 때는 알게 모르게 칭찬을 받고, 부모에게서 분리되거나 독립하려 할 때는 은근히 거부 당하는 경험이 축적되는 것이다. 발달상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도움과 보살핌을 제공하는 것은 아이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노골적인 통제를 의미한다. 특정 행동의 대인관계적 차원은 발달적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 어떤 맥락에서는 보호인 것이 어떤 맥락에서는 통제가 되고, 또 다른 맥락에서는 비난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은 가능한 모든 형태의 통제에 종속되기 쉬우며, 자신이 불완전하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존하려 한다. 유능한 누군가와 함께 있고싶어하고 보살핌을 받는 대가가 자신에 대한 학대라도 참아내게 되는 것이다.


대인관계 양상을 보면 이들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구는 없고 다른 사람들이나 집단 또는 지도자의 욕구가 곧 자신의 욕구가 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개성과 자율성을 포기한다. 또한 이렇게 의존적일수록 더 쉽게 타인의 공격이나 거부의 표적이 될 수도 있고, 특정한 사람들은 이들의 복종적이고 헌신적인 태도를 이용하고 학대하기까지한다. 이러한 이용과 학대 때문에 마음 속에는 분노가 쌓일 수 있지만 이들은 그러한 분노를 억제하고 또 다시 타인에게 굴복하곤 한다. 의존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독립’과 ‘의존’의 두 축이 심각하게 깨져서 자신은 거의 노력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도움과 보살핌에만 의지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참된 독립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타인, 혹은 세상에 대한 믿음을 함께 가지고 이 두 요소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인데, 이들은 이 두 요소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절대적 의존기의 아기는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존재 그 자체로서 사랑스러우며 본능적인 의존의 기술로 사람들이 자신을 챙겨주도록 만든다. 이것이 발달과정에서 충분히 발휘되고 서서히 조절되어야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다. 그러나 봐주는 사람이 없고, 아기의 의존 욕구가 성가신 요구로 치부되는 가정안에서 자랐다면 좀 더 빨리 혼자 뭐든 할 수 있게 된다. 충분한 의존을 통해 충전된 에너지로 힘 있게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에너지를 총동원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뭐든 해결해야 했던 아이는 어른이 되면 지쳐버린다. 그래서 때론 무작정 의존만 하고 싶어진다. (퇴행하는 이유다.) 진정한 독립은 적절한 의존을 거쳐야 얻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독립적으로 보이는 모습 그 이면에는 의존하고 싶지만 의존할 수 없었던 상처를 숨기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독립은 ‘상호의존’과 통하는 개념이다. 참된 독립은 각자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기댈 수 있는 상호의존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학대’라는 말은 무섭게, 아프게 때론 슬프게 느껴지는 말이다. 부모교육을 들으면서 부모가 나쁜 의도를 갖고 아이를 대하는 경우보다는 은연중에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가 자기를 대했던 방식을(학대인든 방치이든) 자신의 아이에게 되풀이 하고 있을 뿐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해로운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존감이 낮은 엄마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는 맥락과 같다. 정서적 학대는 엄마가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중요한 ‘어떤 행동을 해주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아이를 끊임없이 모욕하고, 무시하고, 비웃고, 비하하거나, 비교하거나, 혐오나, 경멸하거나, 조롱하고, 거부하고, 비난하는 언어적 학대뿐만 아니라 아이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비합리적인 요구로 아이를 과잉 통제하거나 또는 독점하여 정서적으로 아이를 숨 막히게 하면서도 특별한 이유 없이 아이의 요구를 거부하며 아이를 차갑게 대하고, 벌로 말을 안하거나, 무미건조한 눈으로 반응해주지 않고, 태만하고,(생일을 잊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을 사주거나, 칭찬을 해주지 않는 것), 험담하거나, 성공을 깎아내리거나, 쳐다보지 않거나, 애정표현을 해주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살지만 어떤 엄마는 술이나 잠, 텔레비전, 독서를 탈출구로 삼는 경우도 많다.(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어도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방치는 신체적 방치와 정서적 방치로 나뉘는데 신체적 방치는 부모가 아이의 정서, 사회적, 환경적, 의료적 욕구와 아이가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것을 주지 않는 것이다.(음식, 쉴곳, 위생에 대한 주의, 적절한 개입과 관리) 정서적 방치는 아이의 정서적, 심리적 성장과 발달에 필요한 양육과 지지를 해주지 않거나 아무런 지도를 해주지 않는 것이다. 엄마가 모든 일을 통제하고 과잉보호를 하면 자녀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이나 책임지는 법을 배우지 못할 뿐만아니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하나도 모르고 건강이나 외모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인다. (먹는 것, 입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행동한다.) 특히 인정받고, 사랑받고, 정서적으로 지지받고 싶은 아이의 욕구에 무관심한 것 즉 아이가 어떤 감정인지, 무슨 활동을 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있는지 관심 없어하는 것은 정서적 방치이다.

 

노골적인 학대보다 방치를 당하는 것이 더 해롭다는 심리학적인 연구결과가 있다. 여러 부류의 아이들을 조사한 결과 정서적으로 방치당한 아이들이 가장 불안하였고,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런 아이들은 공격적이든지 움츠려있든지 극단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정서적 학대와 방치는 아이에게 자신이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다거나 나쁜 아이라는 메시지를 말과 분위기로 전달한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가 왜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지를 이해하기위해 자기한테서 비난받을만한 결점을 찾는다. 이렇게 아이가 엄마로부터 거부당한 경험을 내면화하면 엄마의 거부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아 발달이 손상되어 부적응의 문제가 생겨난다.(부정적 자기상과 낮은 자존감) 엄마에게 공감이나 칭찬,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약해지면서 자기파괴적인 행동, 무감각, 우울과 같은 증상을 갖게 된다. 언제 엄마의 사랑이 거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위협속에 자란 아이는 심각한 불안과 적대감으로 끊임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원래 생각하는 방식이 자기중심적이라서 사람들의 반응도 모두 자기와 관련이 있으며 자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원인이고 사람들의 반응은 그러한 원인의 결과라 여기며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공감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자기만의 관점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보고 그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상상해 볼 수있는 힘을 가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 속에 갇혀 지내면 어떤 누구의 필요나 관점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모는 자녀가 경험하고 느낀 것에 대해 그것이 맞다고 그 감정이 타당하다고, 그럴만하다고 감정을 확인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자신의 감정이나 지각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내가 제대로, 맞게 느끼고 있는 거구나. 원래 그런 거구나’라고 생각해야 세상에서 혼자라는 느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퇴행이나 공상의 세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의 힘들고 슬픈일에 대해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하면 아이는 혼란스럽고 결국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끼며 외로워진다. 사람은 자신만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하고 존중받아야 자신이 정상이라고 느껴지게 된다. 자녀를 숨막히게 소유하는 엄마는 아이에게 나쁜일이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을 밑바탕에 두고 행동하며, 아이를 지배하며, 아이가 꼭 자기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또한 혼자되는 것이 두려워 자녀가 의존하도록 만드는데, 다른 어른에게 기대해야 할 욕구를 아이를 통해 채우려는 것이다. 엄마의 강한 소유욕은 아이를 빼앗아 갈 것 같은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 대해 질투를 하는데, 자녀의 친구뿐만 아니라 주변인에 대해 나쁜점, 부정적인 것을 찾아내어 지적하면서 아이에게 긍정적인 경험이나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 엄격한 부모는 자녀에게 어울릴 만큼 괜찮은 상대가 없다고 느끼게끔 만든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믿지 못할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준다면 자녀에게 자기실현 예언이 되어 부모의 말대로 된다. 부모의 말대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자기를 실망시키거나 상처주거나 이용하려고 하는 대상으로 착각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자신의 욕구를 지워버렸기에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게 힘들어진다.

 

이렇게 폭군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면 아이는 부모를 대할 때마다 약해지는 느낌을 받고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는데, 그로인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무언가를 지시받게 되면 너무나 긴장하고 두려워진다. 이러한 무능력한 느낌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가 없게 된다. 물리적인 힘을 가하면 무엇이든 부러지듯이 너무 많이 통제하는 부모의 아이는 정신도 깨져버린다. ‘싸이코지만 괜찮아’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 독립과 의존의 문제를 안고 있다. 진짜 싸이코인 엄마의 강압적인 통제 속에 자란 동화작가 고문영은 엄마가 만들어낸 세계에 갇혀 자기 자신도 엄마처럼 감정 없는 빈 깡통이라고 믿는다. 엄마처럼 폭력적으로 분노를 폭발시키고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상처에 무관심하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문상태는 동생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하기 힘들다. 동생이 자기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원망과 분노를 가지고 있지만 동생의 보살핌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 동생 문강태는 형을 돌보기 위해 자기를 낳았다는 엄마의 말에 상처받고, 차라리 형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분노하며 온전히 자기 자신이기를 원했지만, 불행하게 살해당한 엄마를 위하여 엄마가 원하는 대로 형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엄마가 만든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즉, 형태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혹은 알더라도 포기한 채 자기 발달을 멈춘채 살아간다. 모두 적절한 의존 경험을 못하였기 때문에(상태는 과잉보호로, 강태는 죄책감으로, 그리고 문영이는 학대로) 의존하지 못하여 의존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혹은 의존하지 못하여 현실과 마주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학대나 방치당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가 심어준 부정적인 믿음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 이유는 여전히 부모에게 정서적으로 매여서 개별화 과정을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별화란 가족과 부모로부터떨어져 별개의 독립된 개인이 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정서적 방치나 학대를 당한 사람은 어렸을 때 받지 못했던 것을 받고 싶은 간절한 욕망으로 인해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서로 어렸을 때 받지 못했던 사랑과 격려를 부모대신 해주고, 표현하기 두려웠던 분노를 표현하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인정하고 그러한 욕구를 부모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부모밑에서 겪은 고통과 거부, 유기 그리고 배신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게 된다. 나 역시 엄마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지낸 시기가 있었고, 아무 비판이나 잘못된 가치관과 믿음을 그대로 수용했었다.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하고, 부모와 정반대인 사람이 되려고 무지 애를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엄마와 달라지려고 애쓰는 것도 그대로 따라하는 것만큼 엄마에게 밀착되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안 좋은 쪽으로 정서적으로 매여있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노력은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 엄마를 절대 화나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로 인해 건강한 경계나 한계선을 긋지 못했다. 그래서 분석을 통해 엄마의 행동이 내 삶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해 진실을 똑바로 보면서 독립을 시작하였다.

 

엄마에 대해 느끼는 정당한 분노를 표현함으로써 그런 깨달음에 힘이 실렸고, 정서적 분리과정은 속도를 내게 되었다. 엄마에게 맞서서 ‘노우’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했고 기운이 났다. 그것은 미비하지만 엄마에게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나를 올바로 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이 드라마를 볼 때 자신은 없고 형의 보호자가 되어 살아가는 강태의 모습에서 엄마의 조력자로 살아온 내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의 욕망은 언제나 나의 것보다 우선시 되었고, 엄마의 욕망이 아닌 것을 꿈꿀 때면 늘 불안과 죄책감, 때로는 열등감이 생겨서 늘 내것을 평가절하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엄마가 원하는 것은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대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화장 한번 안 하면서 엄마의 예쁘다는 말을 기다리고, 어떤 말을 하면 엄마가 나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엄마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지... 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내가 짜증 나서 화가 날 정도다. 나는 엄마가 기대한 대로, 또는 계획한 대로 착하고 말 잘 듣는(엄마를 잘 돕고, 오빠와 동생에게 무엇이든 양보하고 도와주며 잘 챙기는) 그러면서도 자기 일은 스스로 잘 처리하고 공부 잘하는 그런 딸이 되어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엄마가 만든 내가 진짜 내가 아닌 줄도 몰랐다.

 

너무 좁은 세상에서 엄마 이외의 다른 비교 대상도 없었고, 멘토나 모범이 되어 주거나 나를 보호해 줄 다른 어른도 없었다. 어쩌면 찾아 볼, 엄마가 세운 울타리 밖을 쳐다 볼 기회조차 통제되어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버지는 문영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엄마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내 세상을 꿈꾸는 게 엄마를 배신하는 일이라는 죄책감으로 느껴졌고, 자기 발달은 힘든 일이 되었던 것 같다. 엄마가 나에게 부여한 대로, 혹은 훈련받은 대로 세련되게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은 참 쉽다. 내가 받지 못한 의존을 남에게 제공하면서 나의 상처를 달래고 있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오랜 시간 생각하고 다시 드라마를 보면서 “너는 특별해. 너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라는 문영 엄마의 말은 바로 엄마가 나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고문영 작가는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엄마의 주문으로 평범하게 다른 사람과의 어울림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당하면서 외로운 얼음공주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녀의 이런 모습에서 예전의 나를 발견한다. 나의 차가운 얼굴은 문영의 그것 처럼 나를 보호하는 갑옷이었고, 내가 느끼는 부적절감을(무능함) 감추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남과 다르다는 엄마의 말은 나에게 내려진 명령이라서 내 수준에 맞는 사람은 없다는 기괴한 자만심으로 사람들을 무시하고 나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한 역할에서 특별해지려고 노력했다. 딸로서는 착하고 말 잘 듣는, 학생으로서는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바깥 일에 바쁜 남편이 신경쓰지 않게 집 안 일을 책임지는 부인으로, 시부모님께 순종하는 며느리로, 아이들을 완벽하게 키우는 엄마로... 정말 많은 역할에 딱 맞는 사람이 되려고 미친 듯이 애썼지만, 정작 그 안에 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문영처럼 빈깡통같은 정서로 살아왔다.

 

겉으로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많은 것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안에서는 외로움과 불안감, 그리고 분노와 억울함으로 숨이 막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들키면 안되기 때문에(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니까) 차가운 얼굴로 나는 실수따위 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다른 사람과 관계맺기를 거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문형은 분노에 집착하는 성격유형인데 이러한 유형은 다른 사람에 대해 지독하거나 적대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런 지독함이나 적대감이 원래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생겨난 이유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대하는 일반적인 반응이 되고 만다. (학대한 사람과 자신이 동일시되어 그렇다.) 그리고 고문영은 자기중심적인데 모든 것이 엄마 중심이었어서 그렇다. 엄마가 필요로 하는 것, 엄마가 관심 있는 것, 엄마가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고문영 엄마는 매우 자기애적이였는데 자신이 바쁠 때는 감히 방해하지도 못하게 했고, 안 그럴 경우도 마치 엄마를 성가시게 하고 그것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느끼게 하였다. 고문영이 능력이 있을 때는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서 그런거라고 자부했다. 그렇게 자기도취적인 엄마는 자신의 행동과 경험하는 모든 게 자신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자녀가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줄 수 있을 때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학대를 받게 되면 아이는 많은 문제를 갖게 되는데, 아이는 부모에게 분노를 품고 부모와 자신이 하나가 아니며 자신이 외톨이라는 단절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고문영은 늘 혼자 였다.) 부모에게서 받은 부정적인 비난은 사실은 부모가 싫어하고 거부했던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렇게 깔아뭉개진 경험은 성공경험이나 기쁨뒤에 (삶이 잘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뭔가 나쁜 일이 뒤따라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반드시 재현된다. (머리나 발, 손을 찧거나 약한 의사소통, 체념, 수동성, 후회, 죄책감으로 괴로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문영이 다행히도 자신을 학대한 부모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분노의 핵심이 올바른 방향으로 즉 자기 자신이 아닌 바깥 대상으로 향하게 한다. 정당한 분노는 마음속의 수치심을 밀어내버릴 뿐만 아니라 분리-개별화 과정에도 도움이 된다. 분노는 사람을 분리시키는 기능이 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보통 그 사람과 가까이 있지 않는다. 또 분노는 변화하고 싶은 동기와 힘을 준다. 부모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중요한 관점이다. 부모와 이어진 건강하지 못한 정서적 끈을 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라는 감정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닌데, 분노가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그 분노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분노를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쏟아낸다면 그때 분노는 부정적인 것이 된다. 분노를 억누르다가 자신을 향해 써도 안된다. 분노를 풀어낼 건설적인 방법과 안전한 장소를 찾는다면 분노는 삶에 에너지를 주고, 동기부여를 해주며,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해주고, 힘을주고, 창조력을 주는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엄마가 나를 대했던 악의에 찬 방식으로 인해 나는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차갑게 심판하며 절대로 마음 편히 쉬거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항상 나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강력한 마음속의 비판자가 존재한다. 때론 그 목소리가 (습관적으로 작동해서)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 의기소침해질 때가 많다. 상담에서 이 파괴적인 비난자를 소환해서(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비난의 대화를 바깥으로 빼내서 의식하는 것) 날려버린곤 하지만 되돌아와 나를 괴롭힌다. 특히 수치심을 느끼는 스트레스 상황에 있을 때(나자신이 취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나 부정적 자극이나 발가벗겨진 기분이 드는 상황일 때) 이 비판자를 강렬하게 느껴져 그 말이 지극히 타당하게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비난하는 데 익숙해져서 그렇게 느낄 뿐이란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온통 엄마한테 신경 쓰느라 정작 사랑하고 관심을 주었어야 할 나는 이 세상에 제대로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 동안 나에게 주어졌던 그 많은 발달의 기회들이 접혀져 안타깝고 억울했다. 문영이와 강태, 그리고 상태는 좋은 어른들이 주위에 있기도 했었고, 과거의 상처를 직면할 수 있는 성진시로 돌아와 상처를 마주할 용기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함께 상처를 직면하고 부딫힐 수 있도록 서로를 버텨주었다. 이들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어른으로 성장, 독립해 가는 모습이 참 좋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상담하면서 엄마에게 맞서 어떻게 상처를 받았고,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말하거나 공격을 하면서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게 엄마를 변화시키는 방법이라고 잘못 생각했었다.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상당량의 분노를 긍정적인 방법으로 발산하는 게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와 직면할 때 힘 있고 분명하게 자신감있는 태도로 불만을 대면할 수 있게 되고,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거나 주체할 수없을 만큼 까부러지는 일도 덜하다. 엄마에게 직면시켜야 할 내용도 명료하다. 부모에 대한 분노를 올바르게 풀어내면 자연스럽고 건강한 감정이 되지만 비난은 소모적인 부정적인 경험인 되는 것 같다. 누군가를 비난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안 좋은 쪽으로 정서적으로 매여 있는 것이라고 했듯이 분노를 건설적으로 발산하는 것은 문제를 이겨내는 좋은 정말 유익한 방법이다. 건강하지 못한 감정의 끈을 잘라내버리고 괴롭히던 관계를 풀어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니까 말이다. 부모와 직면하는 과정을 통해 더 이상 부모가 우리를 겁주고 통제하고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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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