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스터디 분석 후기
    상담 스터디는 김은옥 정신분석상담사의 슈퍼비전 아래 개인분석 경험 있는 일반인과 상담 전공자가 상호작용하며 자기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소모임입니다. 본 교육원에서는 더 많은 분들께 도움 드리고자 스타디에서 나온 깊이 있는 자기분석 글을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삶의 문제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3.의존성 성격 - '경이로운 소문'

의존성(주황님)

 최근에는 목구멍에 박힌 가시처럼 엄마가 걸린다고 고백하는 딸들이 많아졌습니다. 엄마에게 느끼는 이런 종류의 위화감을 ‘사랑’, ‘감사’ 가 아니라 ‘미움’, ‘숨 막힘’ 등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회도 점점 이런 딸을 은혜도 모른다고 비난하지 않고, 모녀 관계가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경우 양쪽의 문제임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딸의 독립을 방해하는 엄마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딸은 자립심과 의존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려고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엄마와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고, 혹은 엄마가 지나치게 싸고 돌며 과잉보호한 게 그 원인일 것입니다.

 

저처럼 엄마에게 마치 인형처럼 귀여움을 받거나 관리당하며 자란 탓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엄마에게 의지하면서 분노와 불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부모로부터 과잉보호를 받았을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수용되지 않으면 외롭습니다. 저는 엄마와 전혀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애정이 결핍되거나 가혹한 훈육을 받은 사람도 절망감이나 고독감에 빠지지만 과보호속에 자란 아이 또한 엄마 마음에 들려고 갖은 애를 쓰고, 엄마와의 관계 연장선에서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쓰게 되는데 (생존하기 위한 방어, 거짓, 가면이죠.) 역시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전달할 능력이 계발되지 않아서 자기소외가 크게 일어납니다.

 

또한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 주변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남을 배려하는 행위가 과하게 자기희생적이라면 자신의 감정과 욕구는 사라지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주변 사람에게 적응하고,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밀착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상대방과 진정한 동화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융합관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혼자가 되는 상황을 피하고 안정감을 얻으려는 것이니까요. 사실 의존관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장기적으로 건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대상을 과잉의존하게 되면 자신의 자율성이나 능동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죠. 위니캇의 비통합 경험에 대한 주제를 공부하면서 자율적인 사람은 누가 시키든 시키지 않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든 혼자 있든 기본적으로 그 모습에서 차이가 없다고 배웠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언제나 자신의 일을 스스로 잘한다는 뜻입니다. 자율적인 사람은 삶과 행위의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와 융합되어 있을 때도 생동감 있게 대화하기가 어렵고,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맞추느라 힘이 들어요. 사람을 만나도 호기심을 갖고 진득하게 알아가기보다 불안들로 인해 경계하고 의심하여 감정이 소모되곤 해요. (사람을 만나고 나면 기진맥진을 해요.) 엄마는 저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습니다. 아이가 울 때마다(다양한 욕구로 울겠죠.) 잘해주는 좋은 방법으로 먹이기만 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신체욕구와 심리적 요구(감정적 요구)를 혼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커서도 외로움이든 분노이든 잠이나 식사 등 본능만 충족하려듭니다. (외로운지 지루한지 배가 고픈지 구분이 안되는 거예요.) 하지만 감정적인 결핍, 정신적 욕구는 먹는 것이나 자는 것만으로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불쾌함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습니다.

 

저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분명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내적인 한계는 허기나 포만감 등 몸이 보내는 신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적절하게 반응을 하는 것인데,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해서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계속 뭔가를 먹어요. 외로워도 먹고, 슬퍼도 먹고, 화가 나도 먹어요. 한편 외적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과의 감정에 대해 한계를 긋지 못하는데요.(부적절하고 침범적인 말이나 행동에 경계를 세우지 못해요.) 저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전염이 되고, 존재가 와해되기도 합니다. 제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그 결과 남의 문제가 제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제 안에 아무것도 없어서인지 그냥 다른 사람이 훅 들어와서 그 사람의 기분을 따라가고, 그처럼 불편함이 느껴지며 우울해지고 짜증이 납니다. 저만의 생각과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는 게 버겹고 어렵습니다. 엄마가 항상 미리 하나에서 열까지 메뉴를 정해주어서 무엇을 해도 별 재미가 없고, 인생에서 중요한 게 하나도 없는 느낌이 큽니다. 진정한 기쁨이 없는 공허한 상태죠. 공부나 일이 고역이 아니라 저의 정체성이자 삶의 중심이고 사랑대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주체성이 상실되어 그렇습니다.

 

어릴 적 기분이 좋을 때도, 불쾌할 때도 엄마는 그때그때 적절한 반응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의 바람이나 간절한 소망, 취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경험을 수없이 하였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엄마에게 의존한다면 유아의 마음이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불안이 일어납니다. 매사 무엇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상담에서 제가 배우고 있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은 끝까지 익숙하지 않더라도 불안해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은 다시 안하기로 다짐하고, 잘한일에 대해서는 자기 확신을 키우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과 관계에 도전하는 것, 나의 자율성과 잠재된 능력을 펼쳐보는 것, 나의 선택으로 결과가 달라 질 수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삶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는 게 참 좋습니다.

 

엄마는 발달을 위한 저의 다양한 노력을 지원하기보다는 대체로 저지하셨어요. 그로 인해 엄마에 대해 의존적인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데요. 저는 엄마의 무의식적인 요구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엄마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엄마를 뭐든 해내는 척척박사, 만능해결사, evergreen 같은 분으로 멋진 어른이라고 칭송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약하고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를 거의 우상화한 거예요. 제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범위가 컸다면 엄마에 대한 과잉 이상화는 작아졌을 거예요. 부모님이 자립심을 지원해주면서 저의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까지 깨닫게 도와주셨다면 현실적인 능력이 생겨났을 것 같아요. (부모님에 대한 현실평가도 가능했을 것이고요.) 엄마가 저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리불안이 가장 큰 원인 같아요. 엄마는 자신이 용인할 수 있는 만큼만 독립을 허용해주세요. 모든 걸 엄마와 함께 공유하면 만사형통이지요. 엄마와 저는 서로에게 제일 친한 친구입니다. 저의 일의 낱낱이 꿰고 계세요. 감정적인 비밀도, 신체적 비밀도 없었어요.

 

비밀이나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담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충격이었어요. 자식과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것을 좋은 부모 자식관계로 착각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반드시 자식이 보호자 역할을 떠맡아 미숙한 엄마를 돌봐주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요. 엄마는 아이처럼 자기 심경을 털어놓고, 저는 부모처럼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위로하고 조언을 해요. 엄마와 아이의 역할이 바뀌었지만 엄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해요. 저는 때론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려 깊은 어른 흉내를 내며 엄마의 기분을 헤아려주고, 너그럽게 충고를 하면서 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죠. 그러면 엄마는 저와 생각이 같고, 같은 것을 원한다고 착각을 하십니다. 엄마는 가족 내에 위계질서나 경계가 없으세요. 특히 부모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해서 제가 늘 중재자 역할을 하며 부모님 관계를 안정시켜드렸어요.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맞춰드리는 것을 멈추게 되었을 때 엄마는 그토록 사이가 좋았는데 제가 갑자기 변한 이유는 밖에서 나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누군가 빼앗아 갔거나) 사실은 뒤바뀐 엄마와 제 관계가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원래 부모 자식관계로 되돌아가서인데요. 아마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는 제 모습을 탐탁해하지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거예요. 선생님은 엄마에 대한 반발은 자연스럽고 회복의 과정이라고 하셨어요. 적당히 엄마에게서 도망치려는 사람은 상처를 극복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자신의 독립성을 되찾기 위해 각오를 다지는 사람이라고요.

 

 엄마는 저한테서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해 필사적이신데 헌신으로 저에게 공을 들이고 그 보답으로 저의 온 마음을 바라세요. 저의 전부를 원하세요. 하지만 엄마가 저의 일을 대신 해주었기 때문에 저에 대해 책임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몰라요. 어쩌면 엄마와 저 사이에 직접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어요. 갑자기 평생 지내온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니 두렵고 힘들어요.

 

대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안정적이며, 의지할 수 있는 선생님과 스타디 관계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그런 단계를 거쳐 엄마와의 관계도 새롭게 안정화 될 수 있다고 하니 안심이 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두지만 배려심 있는 관계를 하면서 지내보려고 합니다. 저도 그러하지만 엄마도 가족 외부에서 건설적인 관계를 맺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 분리불안이 끝없이 야기된 것 같아요. 자립적이지 못한 엄마는 자기 의지대로 저를 조종하면서 대리만족을 얻으셨던 것 같아요. 엄마의 헌신은 저의 진정한 욕구나 주체성을 무시한 것이에요. 저의 독립이나 성공은 엄마에겐 실패이고 상실인 것 같아요. 엄마와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 ‘엄마 곁에 있어야 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날 떠나면 안돼’로 인해 저는 엄마와 거리를 두려고 하면 모든 지원이 사라지고 버림받을 까봐 두렵습니다. (엄마로부터 독립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나쁜 아이로 낙인찍힐까 무섭고, 가족들로부터 거리를 두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충족되지 않은 분리 욕구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저만의 세계로 숨어 버렸어요. 공상세계로 도피한 목적은 엄마가 침범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혼자 오롯이 있을 수 있기때문이었습니다. 독립성이나 개성을 포기해야 엄마의 애정과 관심을 얻을 수 있었기에 외부세계의 경험과 인간관계를 포기해버렸어요. 밀착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마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인정하며, 부모님의 가치관에 의문을 가져보고, 부모님과 충돌할 일을 피하지 않고, 건강한 경계를 긋는 것을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은 모두 행복한 척, 아무 불만도 없는 척 하지만 그 결속력은 모래성 같아요. 남편과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아무런 일이 아닌 듯 부인하셨어요. 오히려 제가 남편에게 엄마 역할을 하면서 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한다고 우기셨어요. 하지만 남편의 행복이나 불행이 왜 제 책임이겠어요? 부모님관계뿐만 아니라 부부관계에서도 자기만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엄마는 “내가 너한테 해주는 것 공짜가 아니야.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고, 나중에 내가 힘이 없어질 때 네가 나를 돌봐줘”라고 하세요. 그 말은 사실 족쇄같은 무거운 말입니다. 제가 엄마에게 드리고 싶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사랑이 아니라 엄마가 원하는 식의 애정이기 때문입니다.

 

유기불안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받고, 늘 관심의 중심에 서고 싶어 하는 유아의 욕구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편과의 병리적 이별을 마무리하고, 진로를 선택하고, 상담을 받으면서 저의 유기불안이나 슬픔은 조금씩 사라지고 안정감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엄마에 대한 의존 갈망도 줄어들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영역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관계가 사랑이라고 믿어온 강박관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느껴야 하는 친밀감은 오직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로 내가 된다. (초록님)

인간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큰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생각나고 서로를 챙기고 보호하려는 사람들이다. 아주 끈끈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이 둘이 잘 공존할 때 건강한 가족이 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위기가 닥칠 때 언제나 서로의 탓을 하며 싸우시는 부모님으로 인해 공포스러웠다.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불안을 없애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린 마음에 다시 태어나면 돈 많고 자상한 아빠랑 나를 예뻐해주는 엄마랑 누가 나를 괴롭히면 한걸음에 달려가 혼내줄 오빠랑 나를 잘 챙겨주는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곤 하였다. 그런데 어릴 적 소망했던 가족의 모습이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에 있었다.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은 악귀 사냥꾼 카운터들이 국숫집 직원으로 위장해 지상의 악귀들을 물리치는 히어로물 드라마인데, 죽기 직전까지 가다 살아 돌아온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가 있다.(코마에 빠진 일들에게 악귀를 잡는 새로운 생이 부여된다.) 소문이가 다쳤을 때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소문이를 고쳐준 사랑많고 음식 잘하는 엄마 추여사, 카운터즈들을 아끼며 물심양면으로 돕는 마음 부자 아빠 최사장, 차가워 보이지만 잘 챙겨주는 하나 누나, 정의롭고 힘센 언제나 소문이 편인 가모탁 형이 있다.

 

형이나 누나가 부모를 대신해서 돌봐주면 이들 사이에는 부모 자식과 같은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다. 동생은 마치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듯 누나나 형에게 응석을 부리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도움을 받는다. 부모든 형제자매든 의지할 곳이 확실한 사람은 마치 수호신을 가진 듯 주뼛거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상대가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가늠한다. 삶의 행복은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나 파트너, 친구를 얻을 수 있는지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혈연으로 맺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서로 보듬고 염려해주고, 싸우고 화해하고, 위기 앞에서는 언제나 한 편이다. 부모 특히 엄마는 아이에게 늘 따스함을 전해주는 존재다. 모든 형제자매에게 똑같이 자애로운 존재여야 하지만 세상에는 변덕이 심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편애하는 부모가 많다. 자녀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주는 희생이 가능한 것은 부모의 성숙한 자기애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라도 알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진짜 부모 자식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마치 남의 자식처럼 거부나 차별을 하는 것은 이 같은 상황의 결과이다. 또한 소문이에게는 같이 속도를 맞춰 걸어주고 실어증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친구들, 무엇보다 소문이를 애정으로 정성껏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있다.

 

헌데 드라마가 끝난 뒤 소문이보다 지청신이 계속 생각났다. 어릴 적 보육원에서 자라 보육원 원장과 입양한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여 끝내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악귀가 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지청신에게 연민이 일어났다. 지청신처럼 학대를 당하고 큰 아동은 커서 범죄에 노출될 확률이 매우 큰데 아동을 학대하는 부모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1. 이유없이 자녀를 의도적으로 벌을 준다. 그들 자신이 상처받고 외롭고 죄책감을 갖고 있고 어려서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2. 공감해주고 보호해주고 애정을 주는 방법을 모른다. 3.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기때문에 아동에게 신체적, 정서적으로 비현실적인 요구를 한다. 부모의 욕구를 채워주는 대상으로 아동을 보기 때문에 원하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분노와 증오를 아동에게 나타낸다. 4. 매우 적대적이고 자존감이 높지 못하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그때 그때 인격이 달라진다. 5. 가족 간의 상호작용이 적고, 상호작용을 하더라도 부정적이라 긍정적인 면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작은 일에도 혼이 나고 비난과 벌을 주는 부모밑에서 자란 아이는 단지 자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자기라는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드라마 속 지청신의 양아버지는 지청신을 범죄의 도구로 쓰고자 보육원에서 데려왔으며 자신의 개인적 유익을 위해 속이고, 지청신의 안전에 무관심하고 그의 미래를 빼앗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못느끼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다. 그렇게 학대받고 자랐음에도 지청신은 양아버지가 별 생각없이 던져준 싸구려 지갑을 친절로 생각해서 소중히 간직하고 10살 때 함께 보았던 티켓을 간직하며 자신에게 나쁜 일을 시킬 때만 찾는 양아버지를 반기며 살갑게 따른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 부모의 애정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동시에 그에 응해주지 않는 부모에 대한 분노 또한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국 갈구하는 마음이 크기에 분노 또한 강렬하다. 지청신은 상처받고 외롭게 커서 결국 아무하고도 관계 맺는 법을 모르고 건강한 죄책감, 인간에 대한 연민과 주고 받는 관계 속 따뜻함 같은 정서적 발달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지청신은 양아버지에게 맞으면서 힘으로 누군가를 누르고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학습하게 되었고, 그럴 때만 자신의 전능성을 느끼기 때문에 죄책감 없이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반면 소문이는 융의 땅을(악귀를 잡는 인간 세계의 협력자가 이용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자리, 악귀가 걸리는 레이더망)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융의 땅을 불러내는 힘의 원천은 누군가를 구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에서 생겨난다. 소문이의 착하고 당당한 스스럼없는 행동을 보면 조부모로부터 얼마나 아낌없는 애정을 받았을지 짐작이 간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배려가 소문이의 튼튼한 자기 인식을 만든 것이다. 소문이는 부모님이 안 계셔도, 다리를 절어도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스스로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 억지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고, 살면서 힘든 일을 만나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다. 소문이와 지청신 둘 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지만,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키워졌는가에 따라 카운터도 악귀도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슬프고 안타까웠다.

 

소문이처럼 신체적, 정서적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신체, 정서, 성격유형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또 다른 면의 우리 자신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이나 환경 때문에 생긴 숙명이 아니며 신념이나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이다. 참된 본성이다. 참자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할 때 핵심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생사, 환경, 성격 특징들이 변하지 않는 일부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것은 일부분이다. 단지 외면만을 정의한다.

 

더군다나 부모에게 받은 부정적인 경험이나 메시지 때문에 자신의 본질이 숨겨지고 덧씌워져 지낸다. 자신의 본질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 부정적인 부모의 메시지, 경험 아래를 들여다 봐야 한다. 참자기는 모든 사람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며 그 고유함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신안에 있다. 그것은 이룩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서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다. 외모나 지적 성취나 직업적 성공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자신의 참된 본성과 교감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지청신처럼 불운하다.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부모한테서 배우고 받아들인 것 이상의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 다는 뜻이다. 소문이가 보여준 정직함, 연민, 의지, 강인함, 깨달음 같은 것이다. 본질적인 특성은 습관이나 교육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누구에게나 깊은 무의식속에 잠재력으로 존재한다.

 

사람의 궁극적인 가치는 신체적인 외형이나 지능, 재능 또는 물질에 달려있지 않다.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는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이다. 소문이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밝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보다 지청신의 정서적 신체적 학대와 외로움이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도 이심전심으로 지청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서이다. 유치원 때 "엄마 미워, 엄마 없으면 좋겠어"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가 왜 미워?"라고 내 감정에 관심을 가지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엄마는 "너 나가,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나도 너 같은 딸 꼴도 보기 싫어, 나쁜 년! 어디서 배은망덕하게 엄마가 싫대? 니가 어디서 태어났는데? 기껏 키워놨더니 별소리를 다 듣겠네. 나가!" 어린 내가 내 마음을 알아 달라고 했던 말이 나쁘다는 말로 돌아오는 이런 반복되는 상황은 내가 엄마를 향해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라는 동안 삶의 이유나 가치, 정체성, 내 삶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건강한 인식을 갖추는 대신 무기력과 무가치함에 시달려야 했다. 선생님 책 내용 중에 "넓은 바다는 작은 시냇물도 버리지 않는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엄마와 내 모습이 떠올려졌다. 엄마의 바다는 어떤 강물도 흙탕물도 다 수용해주어 그 곳에 온갖 식물과 동물이 조화를 이루어 사는 넉넉하고 풍요로움으로 넓고 깊은 대신, 소금기만 가득한 사해바다였고 나 역시 다양한 관계들 속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에 내 마음의 바다 역시 사해였다. 그래서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시키지도 못하고 스스로 정화작용도 일어나지 않으며 다양한 성분 대신 소금기만 가득하여 내 안에서 살 수 있는 동식물이 별로 없는 심리적 영양 실조의 바다다.

 

하지만 수업과 상담을 통해서 실제적인 돌봄을 받는 경험을 하고 좋은 대상 관계 안에서 정서적 지지를 받으면서 환경에 대한 신뢰가 생기자 엄마와 이제 조금씩 분리되는 심리적 재탄생의 기회를 운 좋게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대로” 의존해본 경험이 적어서 주도적인 삶에 대한 불안은 크다. 나는 어려서부터 실제 감정이나 본래의 나를 감추는 것에 익숙해서 억지로 타인에게 맞추고 보호받는 모습이 강했었다. 항상 실제보다 문제가 없고, 더 나아보이는 독립적인 거짓 자아를 만들고 나의 취약함을 허세의 가면뒤에 숨겨 살아왔다. 엄마와 진짜 믿을 수 있는 신뢰관계를 해보지 못해서인지 나는 선생님과도 긴 시간동안 관계를 피상적으로 맺기도 했었다. 수업과 상담을 내 삶과 연결시켜 행동의 변화를 하지않고 지낸 시간이 많다.

 

그간 상담에서 때론 내 욕구와 의견을 꼼꼼하게 들어주시고, 피드백해주신 시간과 수치스럽고 부정적인 이미지나 선입견을 수용을 받은 경험이 바탕이 되어 단지 인정받기 위해 원치 않으면서 무조건 “네”하고 떠맡았던 여러 역할을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 존재감이 확실해지니 나만의 시간적 여유와 활력으로 스스로도 잘 지내고, 일상에서 꾸준히 남을 위해 작은 선행을 한다. 또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현실적 태도를 갖게 되니 홀로 있는 휴식이 너무 평화롭다. 남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No"라고 말해 놓고 그게 너무 좋아서 몇 번씩 생각하며 대견해하고 뿌듯해 하는 내가 유치하지만 괜찮다. 남편과 아이들의 실수에 엄격했던 “내가 죽고 사는데 지장 없으면 괜찮아” 하는 수용과 이해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남들이 보면 대단찮은 일상이라도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되는 날은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삶에 대한 기대도 일어난다.

 

자기 대상들과의 경험이 소문이에게 생동감을 갖게 해주었듯이 나도 그러하다. 얼마 전에 인감 도장을 하나 장만하였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상담 때 선생님께서 부르시는 “민정씨”가 참 따뜻하게 들린 이후 내 이름이 소중해져이다. 선생님께서 불러주시고 함께 라면 우리 식구들이 불러주는 내 이름 “민정씨” “민정선생님”은 다정해서 참 좋다. 존재로서 늘 부족하다고 내가 나쁘다고 여겨져 싫었었는데 도장을 손에 쥐고 울컥했던 모습은 본래의 나를 만난 감동이 아니었을까... 엄마의 모습대로 때로 엄마가 옳다는 인정을 받기위해 애를 쓰면서도 마음의 평화는 없었다. 내가 혼자서 이뤄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엄마한테 물려받았거나 엄마가 도와주었거나 엄마가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는 식에서 벗나 이제는 소문이처럼 당당하게 우뚝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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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