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스터디 분석 후기
    상담 스터디는 김은옥 정신분석상담사의 슈퍼비전 아래 개인분석 경험 있는 일반인과 상담 전공자가 상호작용하며 자기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소모임입니다. 본 교육원에서는 더 많은 분들께 도움 드리고자 스타디에서 나온 깊이 있는 자기분석 글을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삶의 문제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1. 의존성 성격장애-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의존성 성격장애-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시클라멘님)

 

의존성 성격의 특징은 자기 주체성이 없이 무엇이든 남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돌봄을 받고자 하는 지나친 욕구로 인해 (복종적이고 매달리는 행동) 분리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의존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적절하게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아 인식에서 비롯된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별 것 아닌 일조차 부모나 배우자, 친구에게 의지한다. 의존성 성격은 스스로 부적절하다는 느낌과 확인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잘 아는 장소이면서도 어느 길로 운전할지 따위의 사소한 일을 결정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이들은 자기 기분을 표현하지 못하고 참고 있는 사이에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조차 모르게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자신의 기분이나 의지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거나 과하게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크다. 물론 이러한 우유부단함 때문에 비난도 받지만 극진한 관심도 받는다. 하지만 비난받을지, 관심받을지는 돌보는 사람의 심리와 기분에 달렸다. 의존적인 사람은 늘 자신을 돌봐주고 대신 결정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이 어디에 살아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며, 어떤 사람과 친해져야 하는지 남이 대신 판단해 주길 바라지만 이런 대리 행위는 스스로 판단하거나 대처하는 능력을 저하시켜 더욱더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는다. 의존적인 사람은 의지하는 몇 사람에게만 대인관계가 국한되는데, 처음에는 부모였다가 성인이 된 후에는 부모 역할을 대신할 친구, 애인, 배우자이다.

 

의존성 성격 장애자 옆에는 집착하는 엄마가 있다. (사생활에 대한 간섭과 자신이 결정해주는 꽃길만 걷게 한다.) 어린아이 형인 수동적인 의존형은 일상생활의 능력 자체가 저하되어 있을 때가 많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에게 구원자, 대리인, 대변자 역할을 하게 한다. 성인답게 의사를 결정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능력이 부족해서 사소한 부분까지 물어보고 확인을 받아야 실행할 수가 있다. 삶의 중요한 결정까지도 (대리자) 엄마에게 맡겨버린다. 자기 생각을 계획 세워 실행하는 게 불가능한데 동기나 에너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판단이나 능력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있지 못하고(스스로 기능하지 못하고) 항상 같이 시간을 보낼 상대를 필요로 하는데,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 또는 누구를 좋아해서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그 사람과 헤어지면 금방 자신을 지탱해줄 새로운 사람을 물색한다. (새로운 애인을 구해두고 이별을 하기도 한다.) 고독해지면 모든 것이 시시하고 공허해져 무엇으로든 간에 자기를 진정시켜야 한다.

 

또한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반대하지 않는데, 부탁뿐만 아니라 부당한 욕구에 해서 분명히 거절하지를 않는다. 거절하면 자기를 버리거나 경원시 하지는 않을까 걱정해서이다. 남에게 나쁘게 비춰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절할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거절 하질 못해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요구를 받아들여 맞추고 만다. 무리한 제안에 대해서도 싫다고 단호히 거절하지 못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가서(어떤 표현도 없이 기꺼이 감내하는 모습) 악한 사람의 눈에는 이용하기 쉬워 보인다. 의존성 성격은 특히 반사회성 성격이나 자기애성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 쉽게 이용당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비록 비합리적이더라도 기꺼이 복종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혼자가 되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강한 두려움을 갖고,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지와 승인을 얻는 토대인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 결과적으로는 동의하는 듯 보이지만 매사 수동적으로 방관해버린다. 의존적인 사람은 자신이 없어 주변의 평가에 휘둘리는데, 칭찬받았던 일보다는 무시당했던 일을 더 잘 기억하고,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다는 점에서 회피성 성격과 같지만, 의존적인 사람은 타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점이 다르다.(어디선가 도움을 주는 이가 나타난다.)

 

이들은 때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두려워하는데, 능력이 생긴다는 것은 버림받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에 의존해서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지 않는다. 자기 홀로 남겨져 스스로를 돌보게 되는 상황에 대해 비현실적일 정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또한 이들의 내면에는 미움 받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다. 의존성 성격장애자의 핵심은 감정이다. 의지할 대상으로부터 지지가 없어지거나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의존관계를 유지해 간다.(복종하고 비굴한 자세를 취한다.) 대체로 타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고, 싫은 행동을 보고도 묵인하는 이유다.

 

반면에 헌신적인 의존형은 수동 의존형보다 일상생활에 (퇴행적인) 문제가 덜하고, 활동적이기도 하지만 역시 자기가 주체로 살아가는 데 불안을 느끼고, (통제감 높은) 리더십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 좋은 리더를 만나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상대를 잘못선택하면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역시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알아도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다. 파트너를 고를 때도 (환경이나 조건을 무시하고) 아무라도 상관없이 자기에게 잘해주면 된다는 식의 유치한 기준에 치우쳐서 어울리지 않는 상대를 선택하기도 한다. (남녀 구분없이) 본인이 강하게 의존하고 있는 순간에는 부조화나 상대방의 성격의 부조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거나 중독이 있어도, 거짓말을 해도, 파괴적이거나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배우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한다.

 

의존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사이비 신흥종교에 빠져 살기도 하는데 자신의 공허함을 종교적 헌신으로 채우려 해서 그렇다. 자신의 엄마에 대한 냉담한 태도 때문에 종교에서 구원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들이 상담을 통해 좋은 의존의 경험을 하게 되면 종교 활동에 낭비했던 시간을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사용한다. 이들은 그렇게 헌신이라는 구실 아래 자신도 모르게 자기인생을 속박당하고 만다. 불이익을 당해도 관계를 지속하려는 것이 의존성 성격의 특징인데, 자신의 헌신하는 상황이 변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반발이 무섭기 때문이다. (미움 받는 게 무서워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나친 자기희생을 하고, 언어적, 신체적, 성적 학대를 참는다. 물론 부모의 자기애에 봉사했던 상황을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재현하고 반복하기도 한하다. 보통의 사람은 성격장애자의 이상한 행동을 발견하고 초반부터 거리를 두거나 관계를 그만둔다. 하지만 의존적인 사람은 끊임없이 당하면서도 떠나거나 매몰차게 끊어내지 못한다.

 

또한 의존적 성향이 강하면 주변에 약한 사람이 눈에 잘 들어온다. 주변에 혼자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 본인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돕고 보호하는데 적극적이다. 의존적인 사람은 강한 자에게 의지하기도 하지만 약한 자에게는 보호자를 자처한다. 의존성 성격의 사람은 남을 배려하거나 잘해주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특성이 있어서 그렇다.(힘든 사람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여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보살피면서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해 왔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하거나 헌신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경향은 이를 악용하려는 사람을 만나면 보답 없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사실 이기적이고 의리 없는 사람에게 친절이나 헌신을 덜하면 자신감도 살아나고, 과도한 배려도 점차 줄어든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게 된다.(자립의 관점)

 

의존적인 사람이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한다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 죄악감, 상실감을 의미하기에 영웅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의존성 성격장애의 성장과정을 보면 주체성을 빼앗긴 채, 지배적인 부모의 과보호 속에 성장한 경우가 많다. 반드시 의존적인 부모가 의존적인 자녀를 만든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곤란해지면 당장 도와준다든가, 엄마가 제일 옳다고 여기는 것을 아이의 기분이나 사정에 상관없이 강요한 것이다. 의존적인 부모는 자녀가 미숙하므로 대신 해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의 관점이라는 게 문제다.) 그래서 의존적인 사람은 어릴 적부터 주체적으로 행동할 능력 자체가 전혀 길러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막히면 ‘할 수 없다’고 여겨 누구에게든 의지해버리고 마는 이유다.

 

이러한 상태에 고착되면 간단한 일이라도 자기가 판단하지 못하고, 일일이 주변인의 동의를 구하거나 애초부터 부모가 대신 하도록 한다. 스스로 자신은 능력이 없어 할 수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자기 기분이나 주위의 평가에 지나치게 얽매인다. 의존대상은 부모, 애인이나 배우자, 더 나아가 자식으로 옮겨 가는데, 항상 주변의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약한 성격 때문에 그렇다. 자신의 진로나 결혼마저도 부모의 의견을 따른다. (부모의 강요로 결혼을 하면 반발심에 배우자와 불목하게 된다.)

 

매번 자기주장 없이 행동하다가 숨겨진 분노로 폭발하거나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지내기 일쑤다. 자기의 주체적인 사고나 의지라는 것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렇다. 연구에 따르면 부모가 의존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은 경우 자녀는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의존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을 위험이 훨씬 높다고 한다. 또한 의존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부모는 자녀의 발달단계 전반에 걸쳐 다른 건강한 가족집단에 비해 낮은 독립성과 높은 통제성을 보였다. 또한 이 가족들에게선 올가미 같은 애착(enmeshed attachment)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존성 성격장애를 가진 자녀는 부모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면서 보상을 받았고, 부모는 자녀가 독립성을 향한 움직임이 있으면 이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녀의 의존성을 조장하였다. 부모에게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 강박성 성격이고, 부모에게 짓밟힌 것이 회피성 성격이며,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이 의존성 성격이다. 이 세 가지는 여러 형태로 조합되어 병존한다.

 

의존적인 사람은 쉽게, 당장 해답을 구하려고 한다. “어떻게 해요?”라며 도움을 청한다. 누구든 거기에 대답하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 점점 생각하지 않게 되어 곤란한 일이 생기면 당장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상담에서는 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의존적인 사람을 단련시키는 방법이다. 상담에서 이들이 자기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데,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사고는 명확해지고, 기분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자기주장에서 자발성이 생겨난다.)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존적인 사람은 상대의 의견과 다르면 상대방이 싫어하지 않을 지 아니면 대립하지 않을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괜찮아. 같은 걸로. 네가 정해”라는 태도를 그만두고, 일일이 자기가 정말로 무얼 원하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결국 인생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거나 남에게 일임하면 그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든지 위험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 자기 의사를 조리 있게 표현하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은 인생을 크게 변화시킨다. 자신이 의존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자기 스스로 판단하거나 대처하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실제로 스스로 그럴 마음이 있다면 발달할 수 있다. 상담도 그러하고 발달하려면 자신의 시간, 노력, 돈을 써야 하는데 이처럼 무슨 일이든 자신이 위험을 감수해야 능숙해지는 법이다. (외부세계와 접촉해야 생산이 가능하다.) 혼자서 해냈다는 체험을 거듭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부모의 불안이 당사자의 주체성을 봉쇄시킬 때가 있지만 위험을 피하지 말고 감수해나가야 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난 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츠코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에 화가 나 고구마를 몇 십 개를 집어 삼킨 듯 답답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마츠코를 이해할 수 있어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마츠코의 모든 행동은 다른 사람의 사랑과 인정을 받느냐 마느냐 한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나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다른 사람이 내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등 우선적으로 “나”를 중심에 두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마츠코에게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있다면 ‘내가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항상 타인의 욕구, 이야기, 명령, 태도에 반사적으로 자신을 맞춘다.

 

마츠코가 자신의 안위를 버리면서까지 타인에게 맞추는 삶, 자기를 떠나지 않을 사람을 찾는 데에만 몰두한 이유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혼자서는 독립적으로 생활하지 못하고 내내 누워 있는 약한 동생에게만 잘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마츠코의 무의식속에 자리 잡았다. “내가 유능하고 스스로 일 처리를 잘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어, 무의미해.” 그래서 교사가 된 것도 아버지가 원해서, 미용사 자격증도 이발사였던 남자를 위해서였다. 마츠코가 코미디언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따라하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웃음은 그 순간 마츠코에게 평생 특별하게 각인 되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웃게 할 수 있다는 순간 존재가치를 느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아기였을 때 자연스럽게 부모의 찬사와 사랑에 가득 찬 눈빛을 받으며 마치 전능한 존재처럼 “나 중심”의 존재가치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츠코가 느낀 자신의 존재 가치의 중심은 아버지가 중심인 아버지를 위한 도구로서의 존재가치이다. 내가 존재(being)함으로써 인정받는 가치가 아닌 내가 무언가를 해야지만(donig) 인정받는 가혹함이었다. 그러다보니 마츠코는 항상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자기 의지가 뭔지도 모른 채), 아버지를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몸을 팔았고, 위험한 일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도 돌아온 것은 가족으로부터 단절과 애정대상의 자살, 배신, 폭력 거기에 살인까지 저지르고 버림받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의존적인 사람은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못해서 자기주장능력 자체가 퇴화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기분 같은 것들이 애매모호해진다. 이렇게 되면 측근에 있는 사람이(아무나)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자기 인생일지라도 진정한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대상에게 종속되어 단 한순간도 떨어져있지 못하는 그녀의 융합욕구는 자신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자신 안에 상대를 집어삼키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삼켜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떠나지 않았을까싶다. 자기 생활의 대부분의 중요한 영역을 책임지게 하니까 말이다.


‘나의 깨져버린 환상’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빨리 결혼했으면 했다. 백마 탄 왕자님이 차가운 겨울 궁전에 갇혀서 가혹한 왕비의 박해를 받는 날 구해주기를 기다렸다. 왕자님의 사랑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그 사랑은 어떤 것도 다 이겨낼 거라 생각했다. 최근까지도 아빠는 예전에 내가 했던 말 “나는 화장실만 깨끗하면 어디서 살아도 돼!”를 내게 다시 돌려주며 가끔씩 나를 조롱하신다. 나는 정말 사랑만 있다면 그 어떤 곳에서, 어떤 시련에도 행복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직장에서 전남편을 만났다. 바바리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잘 생긴 그에게 한 눈에 반했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날 사랑하다니” 그는 나의 열등감을 채워주었다. 그의 부족한 학력, 직업(같은 직장이었으나 그는 야간 생활 지도사였다.), 경제력은 큰 문제로 보이질 않았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처럼 나는 그를 구제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브 앤드 테이크’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것만큼이나 주는 게, 베푸는 게 행복했었다. 또한 부모님의 치열한 반대는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에게는 오히려 숭고한 사랑을 훼방 놓는 방해물에 불과했다. 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나쁜 마녀인 왕비를 물리치고, 사랑을 방해하는 괴물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왕자님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나의 환상 동화는 끝이 났다. 결혼을 했으나 여전히 나는 어린아이였는데 전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장남으로 조부와 부모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는데 애기 때부터 항상 좋은 것만 먹이고, 입히며, 떠받들어져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에 제대로 대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시부모님은 남편이 뭔가를 원할 때 그것을 온전히 충족시켜주었을 것이다.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매일 아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그냥 편한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고 잘못 학습한 것 같다. 어려운 형편에도 고등학생 때 공부하겠다며 그가 따로 나와 살겠다고 할 때 방을 마련해주고 반찬을 해다 날랐으며, 시어머님은 결혼 한 뒤에도 우리 집에 오시면 내 눈치를 보거나 내가 일하러 간 사이에 집안 청소 뿐만 아니라 화장실 청소까지 말끔하게 해두셨다. 며느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결혼한 아들이 눈치 보일까 그러셨다. 남편은 이기적인 자신의 성격을 뛰어난 강점으로 인식하고 그런 것들을 당연히 여겼다.(자신의 관심사만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다.) 친정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조차 당연시 했다. 나중에는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도 돈까지 요구했다. 다른 사람을 개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받쳐주는 기반으로 보는 것 같았다.

 

전 남편은 나와 실제로, 제대로 관계를 맺었나 싶기도 하다. 그는 내 학벌을 증명하는 학생증을 가지고 다니며 남들에게 보여주곤 했었는데 나를 인생의 동반자로 삶을 함께 할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을 꾸며주고, 빛나게 해줄 그럴듯한 대상으로 일삼았던 것 같다. 결혼 생활동안 사업한다며 주말할 것 없이 새벽에 들어오고, 대화 내용은 일에 대한 포부와 결국은 자신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에 대한 것 아니면 사업을 위해 돈이 필요하니 대출을 받거나 보증을 서달라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였다. 돌아보니 현실을 부정하며 거짓말을 반복하는 인격 장애를 지닌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교양과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직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사회적 불문율을 따르면서 가족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의 토대를 마련하는 게 정상적인 행동일 것이다. 내가 그의 뻔뻔한 행동을 참거나 반격하지 않은 것은 그와 똑같은 수준이 되고 싶지 않아서이다.

 

나도 앞서 얘기한 대로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아이었기에, 그가 쥐어준 신용카드만 있으면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어서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때로는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이상했지만 싸우는 게 싫었다. 엄마 아빠처럼 불목할까 봐, 사랑이 깨질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결혼은 했지만 가족의 온기, 신뢰, 사랑은 없었고 뼈저리게 외로웠다.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희망하면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신호를 무시하며 불안하게 살아 왔다.(새벽녘 낯선 여자와의 통화, 되는대로 달라며 돈을 요구하고, 신용카드가 연체되었다는 우편물에 다른 신용카드를 건네며 괜찮다는 등, 그리고는 오후 늦게 나가서 새벽에 들어와 낮까지 잠을 자는 생활패턴) 나에게는 이상한 사람일지라도 또 다른 사람(밖에서는)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이상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불쾌하고, 위축되고, 모든 게 예측불가능해서 짜증이 나고, 여러 일을 흐지부지 덮어버리는 게 혐오스럽고, 속임을 당하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그를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져 그만두곤 했었다.

 

그렇게 완전히 다른 주파수에서 소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남편 상황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큰 사기를 당했고, 살던 집까지(부모님이 마련해준)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때도 나는 상처받을 아이 생각에 쉽사리 이혼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위급한 순간에도 자기 잇속부터 챙기며, 책임지지 않고 나 몰라라 내 뒤에 숨어 우리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고 이득을 얻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득이 되기보다는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혼자서 잘해보라’며 떠나보내고 싶어진다. 그때 나는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을 위해 법정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는 “이거(이혼) 네가 하자고 해서 하는 거다!”라며 상황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 회피를 하였다.

 

자신만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최우선시하는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다.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은 사회나 주변 사람이 기대하는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행동한다. 정말 부끄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이혼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어른처럼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 처리를 한 게 바로 이혼이다. 이혼서류, 전남편과 얽힌 모든 서류관계 정리도, 짐정리 및 이사도 모두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했다. 이렇게 이혼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 하고 싶은 소꿉놀이에 필요한 상대가 있기를 원했을 뿐이다. 함께 삶을 엮어나가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고, 살고 싶은 바를 무조건 따라 줄 자기대상이 필요했던것이다. 의존적인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를 원하지만 그건 진짜 인간관계, 현실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저 융합이다.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만을 바란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부분 때문에 얽혔지만 서로 필요한 것을 줄 수 없는 관계였다. 어쩌면 나는 불안정하고, 자아상도 부정적인 사람인지 모르겠다. 전 남편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를 나는 우러러보고,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는 나를 모르는 게 아니라 나의 아픈 점, 취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날 만만하게 보고 자신의 감정과 의도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관심이 없고, 손에 넣고 싶은 것이 있으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얻고자 했다.

 

마츠코도 교사로서 유능해서 아마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삶을 보면 그녀가 왜? 라고 의문을 품을 정도로 그녀는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음에도 그녀는 누군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나 역시 학업, 직업,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뭔가 부실한 사람이라서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나보다 ~한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네!’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상대보다 어떤 면에서 못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나는 그로 인해 충족되었고, 어느 정도 충족되면 싫증이 났다. 전 남편도 이전 남자친구에게서 (학벌에 관한) 열등감이 충족되어 싫증이 나던 차에 외모에서 나보다 나은 면을 발견했기 때문에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열등감이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 외부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채워지는 것 같다가도 손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다시 또 부족한 나 자신 때문에 괴롭게 된다. 얼마 전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안정된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게 얻은 좋은 평판이다”라는 문구가 나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명제라 생각되었다. 그래도 이상한 사람인 전남편을 해치울 수 있었던 방법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간파한 후 그에 맞게 나를 무장해서이다.

 

  

‘남들이 싫어하는, 기피 하는 마츠코의 일생-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제라늄님)


혐오란 불결함이나 증오심을 느껴 무언가를 기피하고자 하는 강렬한 부정의 정서상태입니다. 나카지마 테츠야 감독은 비정상적임에도 좌절하기보다 마츠코의 모습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용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분석 관점에서 보면 마츠코가 비합리적인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은 상처받기 전의 모습으로 또는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은 포기되지 않는데, 자식이 부모의 올바른 사랑을 바라는 것은 본성이니까요. 도쿄에서 백수로 지내던 쇼는 행방불명된 고모 마츠코가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유품을 정리해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게 됩니다.(마츠코는 동네 아이의 야구 방망이에 맞아서 53세에 죽어요.) 낡고, 쓰레기더미로 가득 찬 아파트에서 이웃에게 ‘혐오스런 마츠코’라고 불리며 살았던 그녀의 물건을 정리하며 쇼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모의 일생을 접하게 됩니다. 마츠코는 중학교 교사로 일하였는데 제자의 절도사건으로 해고당하면서 가출을 하게 돼요. 그 이후 동거하던 작가 지망생이 자살을 하고(부모에 대한 집착이 대상의 집착으로 옮겨져 상대방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게 무기력하게 만들죠.), 그의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지만 곧 버림받고 절망에 빠져 몸을 팔게 됩니다. 기둥서방에게 마저 배신당한 마츠코는 그를 살해하고 8년 형을 언도 받는데요. 새로운 인연인 이발사도 떠나가고, 출소 후 미용사로 일하던 중 절도사건의 범인인 제자와 재회하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매번 거부와 버림을 받고 충격받을 만한데, 항시 의존할 사랑 대상이 생겨나니 슬플 겨를이 없어요.


마츠코는 부모님의 관심이 필요한 나이에 병약한 여동생에게 사랑을 박탈당하고 애정결핍을 얻게 됩니다.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당한 마츠코는 아버지의 사랑을 무척이나 갈망했지만 주어진 관심과 사랑은 ‘찰나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지독한 외로움) 마츠코는 아버지의 따뜻한 행동을 통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인지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줄 누군가를 평생 애타게 찾아다녀요. 남뿐만 아니라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자신을 따뜻하게 돌보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입니다. 곤란한 상황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거예요. 안전기지가 없다는 것은 결국 안정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방치된 마츠코는 (애정결핍) 마음의 병이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녀가 경험한 가출, 폭력, 불륜, 치정 살인, 자살 시도, 성매매의 기저에는 자존감 부족과 불안정한 대인관계, 매우 충동적이고 감정이 기복이 심한 유아의 모습이 있어요. (유치증, 유아증) 탐욕으로 인해 관계에서 자신의 정서적 욕구를 잘 충족하지 못합니다. 혼자 있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서 타인에게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이 강하고, 자신의 욕구 충족을 미루어야 하거나 견뎌야 하는 상황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마츠코는 평범한 생활이 불가능했고, 거기서 파생된 욕구불만이 파괴적인 행동을 유발했던 것 같아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남자에게 의존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가족이나 타인의 도움을 일절 거부하는 태도가 안타깝게 느껴졌어요.


삶에서 적응하는 다양한 모습은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극복해가는 노력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자아발달에 있어서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여러 이미지를 갖는 건 정신건강에 필수라고 했습니다. 그런한 모습이 행복을 좌우하기도 하고, 좌절이나 실패를 약화시키도 하고요. 남자에게 과하게 의존하는 그녀는 심각하게 공허감에 시달리면서 위협을 받았는데요.(강한 가부장과 남존여비적 사고로 자신을 휘두르는 사람에게서 평안을 얻습니다.) 실제와 (애정망상) 허구 사이의 경계가 없게 느껴졌어요. 우울하고 절망에 빠진 모습이 그녀의 본 모습인지, 남자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밝은 모습이 온전한 자신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의존적인 사람은 누군가가 다가오면 얼굴이 밝아지고, 대체로 명랑한 기분을 드러낸다고 해요.(고달픈 인생사에 대한 지각이 제한되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낙관하며 긍정적인 세계 속에 갇혀 지내서 그러합니다.)


의존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이 자기표현을 못 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행한 면이(부정적인 감정)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고, 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자격지심과 소외감) 마츠코는 혼자 있을 때 고통스럽고 우울한 모습이지요. 감정을 언어화하지못하는 사람은 심각하다고 배웠습니다. 감정은 에너지의 원천이고, 진실을 대면하는 힘이고, 갈등을 해결하고, 정보를 처리하게 돕는 힘이라고 합니다. 감정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인식이 덜 되어 부정적 사고가 두드러지고 무가치감과 적대감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상한 감정에 의해 주변인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근본을 망치는데요. (갈등)문제와 존재를 구별하지 못해서 입니다.(의존이 해결되지않아 문제가 자신이 되는 자기중심적인 태도)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여러 대상에게 확대시키지 않는 다고 합니다. 과연 마츠코가 의존적인 관계 외에 자기 인생을 살기나 한 걸까 생각됩니다. 과한 정서적 의존관계는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루 게 합니다. 어린 시절의 분리(거부나 단절) 경험을 소화하지 못하면 끔찍한 상처가 됩니다. 부모의 물리적인 유기도 문제이지만 심리적인 유기 또한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가 온전히 사랑해준다는 느낌이 없으면 아이는 방치됐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이는 곧 자존감 손상으로 이어져요. 단지 한 집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는 아이에게 수용과 애정의 느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마츠코는 아버지에게 환영받지 못해서인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될까 봐, 해가 될까 봐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 만한 행동만 골라서 하더라고요. 하지만 자신을 죽이고 남의 요구에만 맞추는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인생 자체에 공포심이 커서 자살 충동까지 느꼈으니까요.(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요.) 자신을 부적절한 존재로 여기는 근본적인 결함이 커서 그렇습니다. 마츠코는 남자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을 학대하고 버릴 때 자신은 쓸모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주변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곧 자신을 느끼는 감정이되니까요.(외적으로 체험한 것을 자신과 동일시해요.) 상대방이 멀어지거나 조금이라도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면 의존도가 높은 마츠코는 죽을 것 같은 불안감에 빠졌어요.(독점욕) 의존성이 심한 사람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자신을 도와주는 상대가 자유로워져 언제든 자기에게 멀어지거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서적 의존이 심한 사람은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 곁에 가까이 있으면 됩니다. 마츠코는 자기가 누구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지 못하고, 누군가와 융합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렬해서 아이가 어른을 따르듯이 순응만 하며 살아갑니다. 사랑받고 싶고, 존재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오직 ‘융합’하는 방식으로만 생존했던 것 같아요.

 

마츠코가 살인죄로 감옥에서 신기하게도 잘 적응하며 지내는데요. 의존형 성격은 의존대상이 있을 때는 상대에게 집착하며 공생하니까 주체성이 전혀 발휘되지 않아요. 특히나 의존적인 사람은 정해진 규칙과 자신이 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관습을 무조건 따르는데요. 자기 스스로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마츠코에게 교도소 담벼락이 의존대상이 되어준 것입니다. 마츠코는 남자에게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길 바랍니다. 또한 마츠코는 남자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를 발휘하는데요. 완전한 융합을 꿈꾸며,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그가 자기이고, 자기가 그이지요.) 의존적 공생관계에서는 자기와 같은 생각, 같은 감정, 같은 의지를 지닌 비슷한 파트너를 찾는 행위, 끊임없이 반영을 받고 싶어 하는 특성이 있어요.

 

또한 공생관계에서는 자신과 상대방을 미화하는 마음이 있는데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라고 생각하고, 어린 시절 공주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받아야 했던 것처럼) 자기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뤄질 거라고 믿어요. 상대방도 오로지 자신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멋진 존재로 느껴져서, 그 사람의 부정적인 면이 외면되고 부인됩니다. 마츠코는 남자를 붙잡아 두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자기와 자기 세계) 포기하는데요. 사랑을 받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의존적인 면이 한편으로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애착이 형성되지 않는 위태로운 불안정한 관계모습일 뿐입니다.

 

의존대상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지요. 한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다음 사람과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희망을 갖지요. 같은 대상에게서 희망과 실패를 반복하기보다는 이전의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아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는 게 희망적이잖아요. 마츠코는 자기를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 남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끝내 자기를 버리고 마는 나쁜 사람의 희생양이라고 굳게 믿는데, 자기는 오로지 모든 게 잘 되기만을 바라고 노력했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못해서 잘못된 관계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분명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관계 중독’(공 의존) 특징이에요.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쁜 사람에게 의지할까요? 나쁜 남자의 부정적인 반응이라도 반응이 없는 것보다 나으니까요.(부모관계에서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보여줘요.) 마츠코는 영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맞아도, 죽어도 혼자보다 나아. 지옥이라도 따라가겠어’라고요. 폭력과 방치로 자존감은 무너질지언정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으니 괜찮은 거예요. 마츠코는 반복되는 폭력 속에서 얼마나 강한 자기 비난의 목소리를 마음에 새겼을까요? 그렇게 취약해진 상태로 병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폭력의 굴레에 갇히게 되고요.

 

정서적 의존이 심한 사람은 ‘궁극의 구원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의존 대상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합니다.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상대방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동떨어진 행동을하기에 이릅니다. 상대방의 말을 절대 거역하지 않는데요. “싫다”는 말을 못하니까 결국 상대방의 (옳지 않은)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됩니다. 마츠코는 상대가 자신을 완전히 망쳐놓아도 고맙다고 말한다든지, 좋은 척, 마음에 드는 척하잖아요.

 

상대방에게 원하는 바를 일치시키려고 하려 할 때 ‘싫다’는 절대 할 수가 없어요. 마츠코는 배신과 폭력, 이용당함까지 수락을 하는데요. 심지어 이러한 것을 용서하는 것도 모자라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랑의 처형자‘입니다. 마츠코처럼 의존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기에 외로움을 피하고 대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물론 모욕까지 감수합니다. 그냥 참는 게 아닙니다. 소외되는 것은 불안한 일이지만 이들이 느끼는 공포는 절대적인 것으로 유아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의존하려는 욕구가 커서 그 순간 버림받지 않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마츠코의 모습은 정말 불쌍했어요. 상대가 모진 말을 해도 괜찮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절해도 괜찮고, 심지어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해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공포를 느낀다면 타인의 반대, 무관심, 비판을 견디고 홀로서기가 어렵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마츠코같은 의존적인 사람을 만나면 심리적 부담이 커서 거리를 둡니다. 서로 보호자 역할을 자처해서 공생관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호자-수혜자의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감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타인에게 과하게 의존할수록 쉽게 공격이나 거부의 타깃이 될 수 있으며, 복종이나 희생의 태도를 이용해서 거부나 학대를 유발하기도 하지요. 무엇보다도 자기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타인 사랑은 거짓입니다. 또한 일시적으로 상대를 기쁘게 할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나부터 구했을 때 시작되는 변화 - 당신이 없어도 괜찮아요’

의존은 생존에 필요한 욕구이자 삶의 ‘중요한 기술’이라고 배웠습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좋은 의존을 했다면 이를 활용하면서 안전감으로 불안 없이 여러 능력을 발달시켜 나갈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까스로 여러 불안을 홀로 견뎌내고 있습니다. 엄마의 소유물이 되어(의존의 굴레) 인생에서 무언가 즐겁게 선택을 할 수가 없고, 제 감정을 모르니(엄마에게 물어봐야 하니) 누굴 만나도 생동감 있게 관계하기가 어려워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맞추느라 중심을 잃고 공허감과 강한 불안으로 감정을 소모하며 지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말을 맹신하는 사람은 종교에 자신의 삶 전체를 맡기거나, 고통스러운 비합리적인 연애를 끊지 못하고(데이트 폭력), 갖가지 중독으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 또한 현실에 적응하려 하는데 알 수 없는 불안들로 무엇이 잘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강한 누군가 또는 강렬한 사건, 사고가 확인을 해주어야 알 수있습니다. 저는 엄마와의 융합 관계가 타인과의 관계로 옮겨져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저는 순종적인 사람인데요. 지나치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도우려는 태도가 아마 순종에서 나온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를 때가 많아요.


얼마 전 친구와 부산에서 정말 오랜만에 호캉스를 하게 되었는데 굳이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엄마가 알면 싫어 할까봐, 외로우실까봐, 가고 싶지 않았어도 엄마를 위한 코스를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때론 제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불안해져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이 때때로 다른 사람을 저버리는 법을(노우) 배우라고 알려주시는데요. 해본 적이 없어 정말 어렵습니다. 물론 조금씩 나를 상대로부터 분리했을 때 시작되는 변화의 맛을 알아가고는 있습니다. 저는 강렬한 융합에 사로잡혀(한 몸이 되어) 엄마와 지내왔지만 사실 무미건조한 관계였어요.


엄마는 불안할 때 다독여주고, 자신감이 떨어질 때 괜찮다고 격려해주며, 제가 어떤 상태인지 거울처럼 훤히 비춰주고, 인생에 필요한 옳고 그른 판단기준과 지켜야 하는 규칙을 알려주지 못하고, 과잉보호로 저를 종속시키고 발달을 가로막으셨어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엄마의 간섭이 사랑이라고 착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불행중 다행이 이제는 의지하는 엄마에게 제 결핍된 욕구를 채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중이 빠진 보호는 진정한 안정감을 줄 수 없으니까요.


저의 혼란스럽고 부산한 태도, 모호한 반응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나 행동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는 선생님이 놀랍고 신기할 때가 있지만 사실 제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엄마가 아닌 다른 대상이(선생님) “넌 괜찮은 아이야” 때론 “괜찮지가 않아”라며 가려지고 무시된 욕구를 찾아주는 게 생소하게 느껴집니다.(분리의 관점이 없어서 그러합니다.)


또한 선생님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로는 제가 남을 필요로 하듯이 선생님은 제가 필요한 연약한 분이 아니시잖아요. 저는 엄마처럼 보호자 역할을 할 때, 세게 융합할 때 힘이(에너지) 나거든요. 그래서인지 선생님 앞에서만, 상담시간에서만 자율적인 모습을 보이고, 그 자율성이 외부상황으로 일반화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던, 누구를 만나던 처음에는 혹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 안에 의심, 불신이 튀어나와서 그 대상을 엄마와 비교합니다. 엄마보다 믿을 수 없는 존재, 엄마보다 가치 없다고 판명이 나면 바로 엄마에게 회귀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엄마에 의해서만 살아져서 책임감, 삶에 대한 애착이(자격) 생겨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당분간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은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는 시간이다’라고 말씀해주셨지만, 저에게 혼자만의 있는 시간은 ‘블랙홀’ 그 자체 입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없다고 생각되어 혼자인 시간이 막막하고 불안할 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만나야 할 것만 같고, 그게 아니면 대화상대나 인터넷 등 끊임없이 의존대상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사람은 주체적으로 자율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을 때 힘이 난다고 하는데, 저는 스스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공포가 결국 ‘잘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번져 더 위축되고 폭망할 것 같아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일단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 성취감을 느끼고, 자존감이 자란다고 선생님께서 격려해주시지만 잘 습득이 되지 않습니다. 자율성과 주체성을 사용해야 할 때마다 엄마와의 분리불안의 공포가 밀려와 사방에서 낭패를 당하는 환상이 일어나곤 합니다.(사건, 사고로 상해를 입는 박해불안) 특히나 갈등이나 책임에서 속수무책인 저는 상대방에게 순응하는데, 그 상대가 제 마음 같지 않을 때 그 대상과 관계를 이어나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저는 누구를 만나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탈진’이 일어납니다. 제가 없고 상대에게 맞추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엄마 이외의 사람은 다 불편해요. 남편과 사귈 때 엄마가 전화를 다 엿들어서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의미로)그것이 자연스러워서, 의존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마츠코처럼 불행한 삶을 살아버릴까 무섭습니다.


최소한의 심리적 독립조차 포기하는 사람을 수동적인 의존성 성격장애라고 합니다. 의존적인 사람은 삶의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지원해주고 도와주는 대상이 있으면 제대로 기능하지만 그렇게 해주는 대상이 없으면 심리적 혼란 상태에(불안, 무기력, 저항) 빠져버리지요. 저희 가족은 정서와 인지가 분화되지 않은 채 서로 융합되어 있습니다. 부모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식은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고 발달해가는 것이라 하는데, 저희 부모님은 놓아주기와 연결하기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극단적인 친밀감 또는 극단적인 거리감을 갖고 미분화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감정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은 정서를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집착하는 엄마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과잉 충성을 하는데요.


엄마가 혼자 계시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며 힘들어하신다는 상상을 차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내가 안가다고 하면 엄마가 슬퍼하겠지. 엄마를 배신하는 거야.”) 변화라는 것은 제가 가진 부모에 대한 그림을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상이나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이 사실은 엄마에 대한 미움이라고 선생님이 분석을 해주셨는데요.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일에 전가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이 지긋지긋한데요.(혐오) 엄마에 대한 감정을 전 남편과 여러 사람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일에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분리 독립을 하면 엄마가 슬퍼한다고 해도 그것은 엄마의 감정일 뿐이라고 반복해서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엄마 감정까지 다 떠안을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분리 독립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엄마가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해도 꿋꿋이 제 생각과 마음을 표현할 작정입니다. 엄마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당연한 분화의 모습이니까요. 시행착오이든, 연습이든 대처하면서 반드시 저만의 패턴을(삶의 방식, 환경의 가능성) 만들 것 입니다. 가장 잘 알고 잘 보살필 수 있는 것은 저 자신이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릴 시간을 값지게 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불안한 것은 감정일뿐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일 년 동안 상담 스타디에서 “저만의 능력 성취”를 꼭 해보고 싶다고 강조했었는데요. 단지 진로에 대한 기대나 확신이라기보다 의존적인 성향을 벗어나서 불안정한 모습을 정리하여 제대로 된 직업적 성취, 경제적 이득, 결혼, 확실한 인간관계 등 성인으로써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것 같아요. 사르트르처럼 ‘어떻게 진짜 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해 봅니다.

 

 

‘길버트 그레이프’ - 가족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맨드라미님)

 

영화에서 길버트는 들판 한가운데 있는 외딴집에서(아이오아주의 작은 마을 엔도라) 가족들을 위해 변화와 출구가 보이지 않은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아무 말 없이 가출했던 아버지는 돌아와 지하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였고, 그 충격으로 엄마는 200키로가 넘는 초도도 비만이 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변해가고, 노처녀 누나와 반항으로 똘똘 뭉친 사춘기 여동생, 자폐증을 지닌 남동생 어니는 마음 사람들 골칫거리다. 정서적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든, 돌보는 사람이든) 지나치게 융합하여 ‘숨 막히는’ 관계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모든 정서적 의존이 발생하는 인간관계에서는 예외 없이 심각한 ‘괴롭힘’이 존재한다.

 

실제로 정서적 의존이 심한 가족의 반복적인 요구로 인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는 괴롭힘을 당하기 마련이다. 길버트에게 가족은 자기 대신 일을 결정하고 책임지게 하는 버거운 대상이다.(길버트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때까지 자신을 받쳐 주기를 강요한다.) 의존적인 성인은 자식 앞에서 스스로 아이가 되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거나, 불만을 늘어놓고,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자신에게 필요한 위안을 찾는다. 나도 길버트처럼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살아왔다.

 

의존적인 엄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고,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불안감 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에 대한 나의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엄마를 만족시키고 평화를 느끼게 할 수 없었다. 엄마와 의존적 관계를 맺으면서 결국 연민의 고갈을 느꼈는데(엄마를 도울 기력도 없었고, 도울 마음도 사라졌다.) “나도 누군가가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처음에 느꼈던 엄마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점차 무력감과 회의감, 죄책감, 분노가 생겨났다.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을 많이 당한다. (남편은 내가 정말 밉고 힘들다고 한다.) 상대방의 생각과 느낌을 상상하고 감지하는 게 어렵다는 얘기인데, 관계로 얽히고설키는 게 싫어서 상대방을 나의 필요에 따라 사용해서 그런가 보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인정하며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즉 내가 누구인지, 나를 잘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삶에 대한 결정권을 누구에게 맡기게 되면 나를 알 수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자존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더욱더 많은 것에,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어찌하여 내 안의 지나친 의존을 알아차렸어도 자존감을 억지로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나는 엄마와 맺었던 불완전한 관계가 주변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면서 생각보다 훨씬 불안정한 모습으로 지냈던 것 같다.

 

모두의 말처럼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려워 피상적인 관계를 맺고 지낸다. 예를 들어 남편이 거리를 두거나 부정적인 언사를 보이면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오만정이 떨어져 함께 그 순간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남편이 나에게 온갖 짜증을 퍼붓고 화를 낼 때 혐오스럽다가도 사실 내가 못하는 것을 척척 해낼 때 나를 보호해줄 사람이라는 생각도 일어난다. 우리는 상대의 미숙한 면에 끌렸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는 의존은 사랑을 시작하게 만들지만 끌리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다. 의지하는 것 자체는 사랑은 아니지만 의존은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상대에게 자리를 내주는 존중이며 기꺼이 빈틈을 보여주겠다는 호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약해질 때 남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한 적이 없다. 혼자 있고 싶은 시간과 함께하고 싶은 시간을 구분할 줄을 몰랐다.

 

엄마의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피곤해서(의존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되어) 누군가에게 의존하려고 할 때 불안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제야 필요할 때의 의존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일단 의존하는 내 마음부터 알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의존 이 면에 있는 마음, 욕구를 알게 되면 내려놓기도 쉬워진다. 나아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내 욕구를 살펴주고 나를 단단하게 하는 방법도 실천해 보게 된다. 알게 모르게 엄마에게 계속 의존해서 엄마가 아닌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해결되지 않았다.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불안했다.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누군가 확인해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자기가 형성되지 못해서인지 무의식적으로 강한 대상을 찾게 되었는데, 좀처럼 거절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해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해서 자기주장이 강하고 싫은 소리도 주저하지 않고 잘하는 사람에게 끌린다. 나는 분리관점이 없는 엄마의 관계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문제로 느껴져 생겨난 불안이 엄청나다. 엄마와 절연을 할 수가 없어 거리를 두고 지내지만 (끊어내야겠다는 생각이 크다.) 엄마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 억울해 죽겠는데, 요새 깨달은 바는 의존적인 엄마에게 내가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충성심을 보이면 물질로 보답을 받았지만(나와 의존관계여서 원하는 것을 다 해주셨다.)

 

분리를 시도하면 암묵적인 처벌을 받았다. 병적인 의존은 결국 엄마의 인지 왜곡 및 지나친 통제과정에서 비롯되는데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나약하고 주도적으로 살 능력이 없다고 인지하게 되었다. 의존성 인격장애의 주요한 특성은 일상생활에서 결정을 내릴 때 타인에게 과도하게 조언을 구하거나 확신을 얻으려 하고, 삶의 중요한 대부분의 영역에 대한 책임은 타인이 짊어져야 하며, 의존 욕구 혹은 승인 욕구가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 타인에게 싫다는 표현을 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판단 혹은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로 인해,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데, 어떤 일도 혼자서 잘하지 못해서이다. 때론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하는 등, 타인의 지원과 지지를 얻으려 하고 과도하게 애를 쓰며 지내지만, 혼자 있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불편하거나 무기력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가 타인에게 거절당해서 혼자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두려워 심각할 정도로 걱정에 사로잡힌다.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 타인을 폄하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타인의 도움과 보살핌에 의지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다. 엄마는 (박탈에 기인한)탐욕으로 인해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신다. 소유욕이 강해서 주변 가족들의 애정을 독차지하려 하시기 때문이다.(독점욕과 간섭이 심하다.) 자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움받기를 원하는 관점도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커서 그러하시다.

 

또한 지나치게 부정적인 민감성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욕구 충족을 미루어야 하는 상황을 참지못하셔서 늘 자식과 분란을 만드신다. 서로 말로 헐뜯는 가족들 사이에서 의존적 상호 괴롭힘이 자주 일어난다. 모욕과 욕설의 공격적인 말은 서로 간의 간격을(경계) 부정하고, 각자의 사생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멀리 떨어져 지내는 만큼 혼이 나야 하고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확신하신다. 내 감정이나 본질적인 문제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원인은 이러한 엄마와 가정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엄마는 패쇄 된 사람이다. 자신의 의견을 따르는 것만 당연시 여긴다. 나 또한 어떤 일이 바깥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를 못한다. 우리집이 다른 가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도 못했었다. 부족하고 협소한 경험을 토대로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나를 억지로 맞추며 살아서 나의 진심이나 감정을 사용하지 못한다. (미발달)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서만 괜찮다거나 이상하다고만 생각을 한다. 부모 관계에서 하는 행동을 어디에서든지 당연하게 하고, 부부관계, 자녀 관계, 그 밖의 인간관계에서도 하게 된다. 매사 비슷한 형태로 일어나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이제서야 내 위주로 사고하는 게 하나의 능력이고 발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내 자신을 정말 직시가 어렵다.) 어느 날 길버트 앞에 캠핑카가 고장 나 본의 아니게 마을에 머물게 된 소녀 베키가 나타난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꿋꿋하게 펼쳐가는 모습에서 길버트도 현실도피의 꿈을 꾸게 된다. 엄마는 힘들었던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숨을 거두는데 엄마가 사람들의 우스갯감이 되지 않길 원해서 고민 끝에 집을 태운다. 훨훨 타는 집을 바라보는 자녀들 아마도 그 집은 길버트의 삶을 짓누르고 있던 것들을 태워버리는 행위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챙기도 또 무게감도 견뎠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일임에도 부끄러워하며 숨어지내는 엄마, 가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형 대신 가장이 되어버린 길버트, 노처녀 누나와 사춘기 소녀, 아픈 동생 이들이 서로 부대끼며 화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내는 용기를 배웠다.

 

보살핌은 자기만족의 원동력이라 상대가 자신의 보살핌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걷던 아이가 손을 놓고 혼자 걸어 가고 싶어하는 나이가 되어도 꽉 잡은 손을 놔주지 않는다. 행여 놔준다 해도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하며 다시 손을 꽉 잡아버린다. 실수나 잘못을 겪으면 다시 일어나도록 돕는 게 아니라 다시 의지하게 만든다. 엄마는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다. 이는 자기만족을 위해 자식을 도구화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반항이나 관계 단절로 치닫거나 자신을 보살핌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뿐이다. 좋은 보살핌과 나쁜 보살핌을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좋은 보살핌은 보살핌을 받는 자아를 발달시키고, 나쁜 보살핌은 자아를 억압한다. 좋은 보살핌의 중요한 기준은 상대에게 필요한(상대가 원하는) 보살핌을 주는 것이다. 엄마도 그러하고 나도 상대에게 베푼 것만 강조했지, 상대가 나의 관심과 사랑을 어떻게 느끼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방은 있지만 나와 다른 개별적 존재로서의 상대는 없다.

 

나는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남편 역시 그러하다.) 그 노력이 상대에게 좋은 느낌으로 전달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어쩌면 노력하고 있다는 것조차 상대에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가 원하는 때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가족관계나 부부관계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기호), 나와 어떤 점이 유사하고 다른지, 어떨 때 기뻐하고 어떨 때 상처받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도 된다. 상대의 욕구나 기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하는 것이다.

 

애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숙한 사람은 상대를 위해 노력을 해도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적거나 없어서 엉뚱한 것을 주며 생색을 내며, 배은망덕하다고 비난을 하게 된다. (우리 엄마처럼 말이다.) 식물이나 동물을 키우려면 그 특성을 잘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생명마다 필요한 조건이 달라 무작정의 보살핌은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떤 식물에겐 물이나 볕이 독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상대를 잘 안다고 착각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다는 생각하고 베푸는 관심은 그 사람에게 부담이자 피해가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의존의 기술을 타고 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발달과정에서 충분히 발휘되고 조절되어야 건강하게 독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봐주는 사람이 없고, 자식의 의존 욕구가 성가신 자극으로 치부되는 가정 안에서 자랐다면 충분한 의존을 통해 충전된 에너지로 힘 있게 독립하는 게 아니라 없는 에너지를 총동원하며 살아가야 한다. 스스로 뭐든 해결해야 하는 아이는 어른이 될수록 지쳐버려 그저 무작정 의존만 하고 싶어진다.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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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