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스터디 분석 후기

상담 스터디는 소임을 마치고 2021년 명예롭게 은퇴한 김은옥 정신분석상담사의 지도 아래 개인분석 경험 있는 일반인과 상담 전공자가 매월 1회 상호 작용하며 자기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소모임입니다. 본 교육원에서는 더 많은 분들께 도움 드리고자 스타디에서 나온 깊이 있는 자기분석 글을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삶의 문제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신성한 이혼변호사

🌷2023년 하인즈코헛 상담스타디글


신성한 이혼(말괄량이 삐삐님)

살아가면서 누군가 나에게 종종 ‘네가 옳다’고 말해준다면 심리적 참전상태서 얼마나 든든할까 생각해본다. 불행한 사고를 비롯하여 인간관계에서 형성된 피해자의 고통은 실로 엄청나다. 집단적 고통처럼(가족이나 사회) 보이는 일도 한 개인에 이르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개별적인 큰 고통이 된다. 드라마 신성한 이혼에서 주인공은 독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음대 교수였는데 이혼을 하고 양육권 소송에서 패하고 죽은 여동생의 죽음이 납득되지않아서 이혼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여러 소송을 통해  “당신이 그렇게 힘들었는데 아무도 몰랐군요”하는 자각, 상대방의 힘든 시간을 알아주는 그의 진지한 모습이 건강하게 보였다. 마치 엄마의 세심하고 과감한 지지를 받은 후 홀가분해지는 어린아이처럼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일상적인 적절한 관계 기술의 결핍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목하게 되었는데, 누군가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그의 강직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내안에 숨겨진 문제의식과 맥이 닿아 있어서 그렇다.


심리적 자원을 잘 사용하는 건강한 사람은(건강한 자기애가 있는 사람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신성한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그냥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기보다 고통받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들어주기 어려운 고통에 집중하고 이해하면서 상대방을 제대로 알아주는 것이다. ‘당신이 옳다’라는 말은 모든 상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즉 ‘정상이다’라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처가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 사람은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으면 제대로 삶이 시작된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어른이 되어도 (숨쉬기 위해서-자기 주변에 벌어지는 상황을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기 안쪽에 있는 것을 내보내지 못할 때 고통을 겪을 뿐만 아니라 병이 생긴다.)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옳다’는 확인을 계속 공급받아야 한다. 이 공급이 끊기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진다. 옳다는 말은 내가 어떤 실수를 해도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해와 수용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지지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생각할 수가 있다.  ‘옳다’라는 말은 사람을 안심시켜준다. 신성한은 그런 확실한 자기편 인증이(자기대상의 경험이) 정신에 제대로 새겨진 사람이다.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애정의 확신으로 사랑하는 조카를 찾고 지켜내니까 말이다.


선생님은 일반적인 대화에서나 상담에서 내가 하는 말의 내용을 메시지의 전부라고 인식하지 않으신다. 항상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내포한 정서와 전체를 근원적인 메시지로 파악하고 수용해주신다. 드라마처럼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정서적인 존재다. 그런데 내가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엄마는, 부모님은 내 존재 자체를 제대로 수용해준 적이 없다. 그 결과 내가 옳다는 확인이나 인정으로 자기애가 발달하지 못해서 대인관계에서의 상호작용이나 탐색이나 시도, 노력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존재 자체의 느낌을 엄마가 만져준 경험이 없으니 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때론 합리적인 행동을 해도 제대로 공감받지 못해서 비뚫어진 마음을 옹호하는 궤변을 펼치면서 본질과 멀어진다. 비상식적인 엉뚱한 말이나 행동도 공감받지 못한 결과이다. 나는 소통전에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상황에) 충분하게 집중하지 않아서 공유와 소통의 통로가 막혀서 종종 실수를 한다.(최선을 다했다고 여겨지지만)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과거 힘들었을 때 상황설명이 나올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실과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앵무새처럼  “방법면에서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제일 헌신했다. 너 없으면 어떻게 살겠니? 딸이 있어서 살만하다. 내가 너처럼 이런 좋은 조건이라면 그냥 땅집고 헤엄치기로 살것이다”라고 근거없는 말을 지겹게 반복하신다.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면서(가스라이팅을 하는 자기애 성격의 사람은 자신의 현실인식을 부정하고 본인의 유해한 행동을 대수롭지않게 여긴다.) 엄마는 자신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좋은 부모라고 여기는 데 정말 기가 막힌다. 자신에게 득이 되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거나 엄마를 떠받들어 칭찬하지 않으면 돌변해서 아픈 말을 쏘아댄다. 또 내가 세상에서 궁금한 것을 배우고 경험하려는 것을 허락하고 지원해준 적이 없다. 평생동안 엄마는 내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서 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강한 통제력을 행사해왔다. 엄마가 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지배력을 행사했기에, 삼십 년 넘게 정말 사랑받고 지내는 딸이라는 착각에 깊이 빠져서 비현실적으로 지내왔다.


상담과 스터디를 통한 노력이 없었다면 무엇보다 파괴적 관계를 맺는 배경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기애적인 엄마는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고 한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뿐. 나 역시 배워서 남에게 피해는 크게 주지 않지만 외부세계에 아무 관심도 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어떻게 무슨 상처를 받았는지 알지도 못한다.(물론 그렇다고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나를 마음에 들거나 필요할 때는 소중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내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없다. 엄마에게 있어서 정서적인 유대와 공감은 알 수 없는 차원의 일이다. 엄마는 타인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거나 질투 때문에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의지가 없다.


선생님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우고 익힐 나의 destiny가(삶의 목적, 방향점이) ‘수용’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어렵지만 외부세계와 외부대상을 수용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것이다. ‘정확’이라는 말은 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나에게 초점이 없는 말은 지겨운 말이고, 의미없는 피상적인 말이고, 상대만 있는 말이다. 물론 서로에게 스민 느낌이 없어서 정확히는 상대라는 존재도 만나지지 않는다.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스며들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밀어내는 힘만 크다. 이렇게 소통이 감정노동으로 인식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외부대상과 외부세계를 차단해버렸다. 마음을 토로하는 말과 일상에서 하는 말이 다른데 어디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꺼내야 할지 모르기도 하고 너무 힘들어서 무작정 누르게 된다. 요새는 타인과 대화를 하면서 “내가 그랬구나. 내가 의미를 모르고 반복했구나”가 알아 차려진다.


어릴적부터 최근까지 만성적으로 ‘나’기근에(자기애 상처) 시달리며 살아왔다. 나처럼 ‘존재’를 민폐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님에게 죽고싶을 만큼 힘들다는 마음을 비쳤을 때 그 고통에 아무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 외면당했다. 그래서 사소한 노력이나 접촉으로 일상적인 교감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않으면서 막연한 기대만 한다.(소외감의 원인) 나는 어릴 적부터 현실보다 상상속에서 더 오래 살았다.(멍하니 딴생각을 하며 백일몽에 빠져 지냈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로 바로 뛰어들 자신이 없다. 상상의 세계로 도피함으로써 고단한 상황과 실패를 보상받아왔다. 청소년기까지는 상상으로의 도피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처럼 보이지만 내가 아닌 것을 젖히고(현실도피) 진짜 나를 만나고 싶다. 상상에 빠져들수록 현실을 외면하고, 그만큼 현실을 이겨낼 능력이 떨어지고 실망이나 좌절을 견딜 저항력이 줄어든다.(고립감으로 당연한 현실적 조언도 거부한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자기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존재의 핵심은 ‘감정’이라고 배웠다. 가치관이나 신념은 책에서 잃은 견해이기도 하지만 내 감정이 진짜 ‘나’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기근 상태로 인해서 어떨 땐 사소한 일뿐만 아니라 드라마 한 편도 제대로 보질 못한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 감정이 소거되어 외부세계가 나에게 멀어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즉 뭘 해도 내것으로 여겨지질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항시 내 마음이 어떠한지 물으신다. 아마도 내가 공허하거나 무의미하게 맴돈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물으시는 것 같다. 심리적 CPR처럼 질문 후에 이야기의 질이 달라진다. 별말 아니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가 주목받아서 그렇다. 사람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긴다. 나는 무엇을 하든 허기지다. 일을 하든, 사람을 만나든 충전되지 않는 배터리처럼 쉽게 방전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애에 사로잡혀 주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자기 밖에 모른다.) 항상 타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고 자신의 사랑으로 화답하지 못하는 자기 무능함이 강하다. 하인즈 코헛은 나르시시즘을 설명하면서 한 사람의 자존감의 문제를 먼저 다루었다. 건강한 자존감과 자의식에서 중증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여러 가지 스펙트럼을 설명하였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인지, 사고, 감정, 관계 패턴이 다른 사람과 달라서 개인적, 사회적 상황에서 뚜렷한 행동 차이가 나타난다고 한다. 과도한 야망과 칭찬과 인정을 향한 욕망때문에 사실은 깊은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소하게라도 모욕감이나 압박감을 느낄 때 격한 분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대체로 이들은 인간관계엔 정서적 깊이와 책임감이 없다. 관계를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원인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때문에 자존감을 다친 아이는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그 상처를 보상한다.(발달수준이 아동기에 멈춰있는 이유다.) 또한 자신을 조건없이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를 충분히 이상화할 수 없어 성숙한 자기 조절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자의식을 지키려면 자신에게 공감과 관심을 선사하는 타인을 계속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신성한 변호사의 내공처럼 자신의 학력, 재산, 직업의 역할과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존재감을 순하게 인정하고 보듬고 살아가는 힘을 얻고 싶다. 균형감각이 살아 있어서 자신을 인정하고 응원하다가 좌절을 경험해도 오뚜기처럼 바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또 비관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가르쳐주는 그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건강한 신성한을 보면서 쓸데없는 자존심이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존심은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서 남들 눈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쓸데없는 모습으로 보일수 있지만 자신을 지키는 모습이다. 신성한처럼 나도 나를 지키며 살 것이다. 나 자신의 빛나는 특성을 인정하는 일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신성한은 모두가 어려워하거나 반대하는 일을 밀고 나가 좋은 결실을 맺고, 대다수사람이 옳다고 믿는 일에도 그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부추김에 휩쓸리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신성한 변호사처럼 살고 싶다. “삐삐씨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노련한 신성한의 모습은 의심할 여지 없이 늘 그렇게 노력해온 실력이에요”라는 선생님의 언어가 상상으로 들린다. 선생님께서 늘 할 수 있는 걸 하고, 능력이 우선해야 고생을 안한다고 강조하셨는데 진짜 사회에 나가보니 인간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특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들어온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자기 감각, 믿음이 능력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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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