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스터디 분석 후기

상담 스터디는 소임을 마치고 2021년 명예롭게 은퇴한 김은옥 정신분석상담사의 지도 아래 개인분석 경험 있는 일반인과 상담 전공자가 매월 1회 상호 작용하며 자기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소모임입니다. 본 교육원에서는 더 많은 분들께 도움 드리고자 스타디에서 나온 깊이 있는 자기분석 글을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삶의 문제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좌절의 수정

좌절의 수정(해바라기님)


나는 어릴 적 겁많은 아이였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집에 손님이 오시면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다가 누가 관심으로 안아보려고 하면 마구 울어댔다. 특히 ‘우리집에 가서 같이 살자’는 말이 무서워 대성통곡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방학 때 잠시 이모네 집에라도 가면 그사이 엄마 아빠가 아프거나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에 먹은 걸 토하고 울다가 엄마가 나타나야 진정이 되었다. 또한 엄마가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내가 나갈테니 너희는 아빠랑 잘 먹고 살아라”라는 협박에 엄마 다리를 잡고 매달리고, 엄마가 짐을 싸면 “내가 잘못했다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울었던 모습이 있다. 그 충격으로(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떠날까봐 불안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손해를 보면서 부당한 관계에서조차 (상대방의 예스라는)연결감을 가져야만 불안이 누그러진다.  

 

상대방의 요구가 내키지 않고, 부담스러워서 싫은데도 심리적이고 물리적 경계가 작동되지 않아 심지어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을 내일과 구분하지 못해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20대는 연구실에서 다른 조교와 달리 교수님의 환전 심부름부터 선물할 고기를 교수님댁 근처에서 사오는 일, 술자리 대리운전, 치과 예약까지 도맡아 했었다. 그때마다 교수님은 “다른 애들은 안해줘도 넌 들어줄거지?”였다. 나는 왜 다른 조교들이 거절하는 일을 자초했을까 억울해했다. 하지만 거절로 인한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이 더 두려워 내가 희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관계의 불편함을 온화하게 처리하고 해결해본 적이 없어서 상대가 나를 거절하는 게 무조건 ‘존재의 거부’로 여겨졌다.  

 

어느 날 몇년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는 동생이 “남편이 사고를 냈는데 천만원을 빌려줄 수 있어?”라고 연락이 왔는데, 그달에 처리할 카드값, 아이들 학원비, 공과금이 떠올려지면서도 해준다는 말을 바로 내뱉었다. 당연히 7년째 그 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거절하면 상처를 받겠지? 오죽 힘들면 나한테 부탁을 했을까? 그래도 그 순간 나를 생각했다는 게 고맙지.”라고 감정을 왜곡해서 현실을 무시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에도 경계가 있으면 쉽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고, 굳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납득할 수 있는 현실의 내용과 부담없이 빌려줄 수 있는 돈인지 계산을 하고, 동생이 돈을 갚을 수 있는 형편인지등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또한 그렇게 오랫동안 관계없이 지냈다면 그런 부탁이 의심스러워 부담스럽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누구에게든 현실의 경계를 적절하게 세우지 못하고 나이브하게(현실 상황과 상관없이 좋게만 생각하다가) 표현하다가 결국 돈, 시간, 감정, 체력을 낭비한다. 그리고 내가 경계를 세우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갈등이 일어나면 엄청난 불안과 공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때는 급히 내 탓을 해야 불안이 누그러진다. 그것은 반성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못하는 공포에서 나온 ‘자책’이다. 최근에 치료 아동의 엄마가 내 태도와 말이 문제가 있다고 센터장에게 컴플레인을 했었다. 치료실을 엄마들이 볼 수 있게 세팅되어있는데 그 엄마가 치료장면을 지켜보다가 내가 아이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우리oo 이렇게 예쁜데 왜 안 웃어?”라고 한 말이 기분 나빴다고 한다.(강요로 느꼈을까?) 또한 아이가 키워준 중국 돌보미의 억양 수정도 싫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그 엄마의 컴플레인 내용을 객관화시키는 대신 그저 불안한 그 상황에 압도당해 “대처를 잘못했으니 내 잘못이라고 생각되어 센터장한테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드려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현실적인 사실과 상관없이 그 엄마의 감정에 압도당해 성급하게 마무리를 한 것이다.  

 

정말로 나는 갈등을 해결하는 적정한 기술이 없다. 꿈 분석을 통해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관계기술의 결핍으로 자책과 분노 그리고 내가 불쌍하다는 자기연민만 크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일상의 적정기술이 부족해서 적절한 인정이나 공평한 관계, 성취의 결과가 참 부족하다. 아동이나 부모의 고통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내 문제의식과 맥이 닿아 있어야만 그것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나는 불편한 진실을 경험하면 모순된(말이 안되는) 악몽을 꾼다. 낮동안 센 부정적인 정서경험을 했을 때 알파기능이(진실한 이해나 수용되는 경험) 생겨나야 꿈꾸기가 가능한데, 그냥 힘들고 기분이 나쁘다는 스트레스만으론 꿈 사고가 형성되지 않는다.  

 

악몽이나 모순된 꿈을 선생님과 한 시간 내내 이야기해보면 그때서야 정확하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나와 연결된 상대방의 하나의 스토리가 꾸며진다. 살아오면서 문제상황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심을 해서 해결해본 적이 없다. 매사 일방적으로 내탓이나 남탓만 하고 살았다.(쉽게 생각하고 배설) 사실 과거부터 질기게 고착된 경험이 좌절인데(반복되는 나쁜 일), 꿈은(알파기능) 실제적으로 좌절을 수정해주고 새롭게 감정처리도(소화) 도와준다. 왜곡되게 감정처리한 것을 다시 처리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좌절에 대한 인내심이(견뎌내는 능력) 있는 사람만 꿈꾸기가 가능하다고 배웠다.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해서 근시안적으로 급히 좌절을 처리해버린다. 물론 수치스럽고 공포스러운 상태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이지만 늘 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 탓을 하며 그들을 바꾸려고 했었다. 하지만 역시 늘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나 꿈에서 다시 무섭게 떼를 지어 등장한다. 

 

모순된 꿈을 꾸고 좌절을 빨리 수정하려는 것 자체가(거부나 단절) 인지왜곡(감정왜곡)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상담에 몰두하면서 공포스러운 경험을 할 때마다 과거 반복해온 병리적인 방식이었던 좌절에 대한 회피에 맞서서 책임감있는 행동을 연습하게 된다. (꿈이나 분석에서의 담아주기와 미러링은)정신화 능력인 알파기능은 현실을 살아내는 힘을 키워준다. 제대로 내 존재감을 이해받으면 조금씩 고통을 참아내고 견디는 능력이 생겨난다. 내가 하는 말실수나 행동은 좌절, 고통을 참지 못해서 하는 액팅아웃이다.  

 

엄마가 어릴적부터 나에게 건강한 정서적 접촉없이 급하고, 사납게, 참을성없이 때론 왜곡되게 내가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게 몰아세웠다. 그래서 나는 책임감을 갖고 현실을 차분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고통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발달하지 못한 내면상태가 늘 고스란히 드러난다.(그래서 늘 현실에서 괴상한 일이 일어나고 관계가 꼬인다.) 엄마의 알파기능의 담아주기나 안아주는 경험으로 심리적 경계가 생겨나면 좋은 것은 정신에 (폭)안기고, 나쁜 부정적 자극은 걸러진다고 한다.(나쁜 것은 자동으로 차단된다.) 그런데 엄마의 담아주기 기능이 부족하면 꿈꾸기뿐만 아니라 자아의 현실기능이 손상되어 문제가 생긴다. 꿈꾸기같은 알파기능이 정신에 없다면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한 극복이나 발달시킬 수단이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머리로는 알아도 놀란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꿈꾸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알파기능을 누군가 해주어야만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스스로 하기전까지) 꿈이 아니라 정신화를 통한 꿈꾸기가(스토리텔링) 정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발달장애 아동의 부모는 트라우마로 사람을 불신한다. 내가 그들과 다른 어떤 전문자격이 있어서 그들을 위로한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사실 이들의 끔찍한 고통에 집중하고 깊이 이해하고 알아주기에는 나는 좌절에 대한 인내력이 부족하다. 사람이면 모두가 겪는 일상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억울함이나 외로움을 느끼는 일차적 욕구에 나 또한 수용과 지지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가 생겨난다. 내담아동이나 부모의 모습이 문제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정상적인 행동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 남보다 특별하게 예민한 구석도 있다. 나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본 적이 있을까? 

 

사실 나도, 그들도 공포를 쉽게 느끼는 사람이고 이 공포는 또 다시 알게 모르게 내면화된다.(불길한 예감, 안좋은 부정적인 생각) 그래서 나는 그 공포를 빨리 없애기 위해 그게 누구이든 상대방에게 일단 맞추고 본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에 그냥 맞추며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공포를 방어하기위해 수십년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자기존재가 집중을 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과 안정을 지녔다.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으면 삶에 자신감이 생긴다. 거기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하지만 나는 존재감을(내가 옳다는) 엄마로부터 당당하게 공급받은 적이 없다. 엄마는 내가 잘못을 했을지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믿어준 적이 없다. 상담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 자체를 메시지 전부라고 인식하지 말라고 누누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내포한 정서와 전체를 더 근원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네가 그랬다면 이유가 있을거야”는 ‘네가 옳다’는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내가 옳다는 존재의 확인을 받고 살아왔다면 사소한 오해나 부정이나 공포는 허무한 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스무살부터 세 번의 연애를 했다. 첫 연애 대상의 아버지는 힘든 환경에서 목회를 하시고, 엄마가 한복집을 하는 가난한 집 장남, 두 번째는 8세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재혼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큰 형네 집에서 사는 막내, 세 번째는 현재 남편으로 부모님을 어린 나이에 다 잃고 동생이랑 둘이 살고있는 가난한 집 장남이었다. 이상하게 불행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더없이 필요한 사람이란 존재감이 생겨났다.  

 

과제를 하려고 자료를 찾다 보니 심리학에서는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왜곡된 관계를 ‘공동의존’이라고 하는데 이는 건강한 상호의존이 아니라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양쪽 다 힘들어지는 병리적 관계를 가리킨다고 한다. 내가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남자 친구의 등록금을 대주고, 대기업 입사 지원서를 뽑아주고, 토익시험 접수와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기도 했었다. 이 또한 내가 옳다고(존재감) 확인받으려는 모습이었다.  

 

살면서 각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서 삶을 살아내는 방법을 몸에 익히게 된다. 이러한 내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상처입은 아이들을(부모들) 가깝게 공감하고(“네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내가 몰랐었구나” 보호해주기 위해 나의 좌절을 견디고 소화해내는 연습을 하면서 상대방의 힘듦을 잘 알게 되고 싶다.  

 


🌿이름없는 불안(김은옥)

엄마로부터 허용되지 않은것들은 현실경험의 영역밖으로 밀려나 '이름없는 불안'으로 성격에 자리잡아 현실에 맞게 적응하고 배우는 것을 방해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밀려난 경험영역을(그리고 관계속에서) 다시 현실로 가져오게끔 우리는 노력을 천천히 하고있습니다.


엄마에게서 허락받지않은 삶의 영역이 클수록 경험의 제한 영역이 큽니다. 엄마가 싫어하는 것 혐오했던건 내인격에 수용하지않죠. 내가 덜 수고하고,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들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있는 것입니다. 지각은 되어도 정서적으로 소화가안되면 '이름없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없다고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름없는 불안에 이름을 지어주고 진심으로  담아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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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