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 칼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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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 만성화된 심리적 결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한 개인의 성격과 행동은 다른 사람의 성격과 행동에 암암리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병리유발적 신념이 강해 나쁜 기대를 갖고 사람을 대한다. 가령 커플 중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적 대상관계' 패턴은(관계하는 동안 투사 내사되어)상대방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서로 미워해도 닮고 좋아해도 닮는다). 대상관계 흔적은 개인의 내면에 있지만 외부대상에 대한 지각내용을 좌우하며 외부대상에 대해(부정적) 환상 관계를 일으킨다. 그 대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끌리고, 좋아하고, 믿고, 숭배와 찬사를 보내고, 또 반대로 경멸하고, 두려움 느끼고, 시기하고, 평가절하하고, 의심한다. "어느 학교 나왔어?, 결혼 했어?, 아이는?, 배우자는 뭐해?, 어떤 캐릭터야?, 박사야?, 능력은?, 인간성은?  음~ 별 것 아니네." 이렇게 우리안에 있는 내적 대상은 새로운 대상을 만날 때마다 진정한 관계맺음을 방해하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왜곡하는 것은 사랑을 갈망했지만 좌절시킨 가학적 부모에 대한 유아기의 마음상태를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것이다.  새로운 대상을 자신 안에 들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던 그 부모관계를 충성스레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격은 어린시절 최초 대상관계에서의 만족과 실망 경험들에 의해 구조화된다. 성적 커플, 돌보는 커플, 유기하는 커플, 박해하는 커플, 이용하고 착취하는 커플, 평가절하하고 조정하는 커플,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안정된 커플 등 관계 양태는 다양하다. 물론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내적대상은 상담치료가 진행됨에 따라 '살아있는 현실' 관계모습으로 바뀌어간다. 가령 상담자는 상담장면에서 만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성실하게 대한다. 그런데 내담자는 적대적이다. 그녀는 왜, 어떻게 상담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은 그 사람이 보고 싶어하지 자신의 어떤 특징이 투사되어 일어난 거부반응이다. 이런 내담자의 불안이 상담자에게 강하게 옮겨지면 서로 맞출 수 있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가 만나고자 하는 '그 대상'은 눈 앞에 현존하는 상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랄한 비난을 퍼붓는 엄마의 입("입술이 기분나빠."), 경멸하는 아버지의 눈빛("나에게 뭘 캐내려는 거지."), 헉 엄마가 이상한 사람만 입는다는 보라색 옷을 입었네." 이렇게 현실에서 불완전해 보이는 사소한 요소를 못견뎌하며 자신이 혐오하는 절대강자로서 이미지를 부풀리기 시작한다. 부모에게 느낀 실망감은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나 권위 있는 존재에 대한 불신이나 반발로 나타난다. 자신의 혼돈을 타인에게 전염시키는 이상한 끌개를 갖고 있기에 새로운 대상을 만나도 아무런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없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무언가를 갖추지 못한 결함 대상으로 보인다. 그녀 엄마처럼 말이다.


상담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내담자의 온전한 자기와 자기대상 관계이다. 자기대상은 과대자기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이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것이 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대가 어긋나면 그 대상을 파괴하고야 만다. 그래서 상담가는 자기대상 경험을 온전한 방식으로 선택하도록 내담자의 자아능력을 발달시키려 노력한다. '왜곡된 자기 구조의 변형'을 가져다 주는 힘은 무엇보다도 '치료관계 그 자체'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녀의 걱정과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싶다는 소망이 자연스레 일어난다.  왜 일까?  그녀가 상담자에게 접촉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외부현실을 받아들이는 상호작용능력을 지녔기때문이다. 상담자를 신뢰하고 소중한 대상으로 대하는 마음과 자신을 반영해주는 상담자의 긍정적 모습을 기대하면서 서로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게 된다. 그 다음에 무의식을 함께 탐색해 나간다. 수년간 쌓아온 관계에서든, 잠깐 만난 관계이든 기분 좋은 이런 유익한 만남은 사실 과거의 긍정적이면서 친밀했던 대상경험이 '지금 여기'에서 발현된 것이다. 


'말자'씨 이야기다. 말자씨는 가죽 카우치와 대리석 책상이 놓여진 럭셔리한 강의실, 엔틱 가구로 예쁘게 정돈된 상담자의 공간 그리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50대 중반의 노블한 여성이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해주는 환상을 갖고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 차이가 있었던지 주변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살피며 오랜시간 침묵했다.  그녀의 부풀려진 자아의 인플레이션 상태가 느껴져서인지 상담자도 자아가 수축되는 디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되었다. "저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만나봤고, 심리학 박사도 여럿 만났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친구의사에게도 조언을 받았지만 신경안정제만 처방해 주더라고요." 그 누구를 만나든 자신의 삶은 변화가 없을 거란 얘기로 들렸다. 그녀의 규정된 말투와 행동에서 타자를 경멸하는 감정이 전달되었다. 


"말자씨는 왜 왔을까? 나도 도움을 줄 수 없겠지. 부디 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를 바랬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기를 기대했던 시간이 가치없게 느껴졌다. 일찌감치 그녀와의 상담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다른 사람의 호감을 쓸모없게 만드는 게 그녀의 전형적인 행동같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늘 아침 꿈을 꾸었냐고 물어보았다. 말자씨는 꿈에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와 꽃, 식물이 가득한 정원에 갑자기 불도저 한 대가 나타나서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짓뭉개버렸다고 말한다.  그녀가 일상의 관계를 불도저로 말끔하게 정돈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자신의 외로움과 슬픔, 공허 그리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걸까? 엄마가 불도저처럼 자신을 찌르고 모욕해서 다른 사람을 망치고 파괴하는 걸까? 아무 도움을 바라지 않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엄마가 어떻게 자신에게 실패했는지 말하고 싶은 걸까?" 


과대자기의 증후중에는 극단적인 파괴성이 있다. 때때로 폭주하여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하는데  어릴적 과대자기의 전능감에 타격을 받아서 일어나는 자기애적인 분노이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뭐든 돌아가기를 바란다거나 자신이야말로 정당하는 생각을 과하게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이나 왕이 하는 행동과 다를바가 없다. 사소한 상처까지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으로 받아들이니까말이다. 아무튼 그녀는 기존의 정신성을 바꾸고 싶지 않은지 다시 상담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아의 자기는 헌신적인 부모와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탄생한다. '자기'는 타자가 확인해주고 반응해주며 사랑해주는 오랜 상호 돌봄 관계 안에서야 적절하게 성숙할 수 있다. 


말자씨의 어머니는 안아주는 환경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가 어머니에게 주는 선물도 산산조각 내버렸을 것이다. 위니캇은 "아기가 없다면 엄마도 없다." 라고 했다. 개인이 안전하게 속해 있는 대상이 없다면 그의 타자성을 규정하고 가치를 확인해주는 대상들이 없다면 정신의 발달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결과 개인은 파편화된 자기 경험과  부분대상 관계가 지배하던 유아기(편집-분열 자리) 상태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오만하고 공허한 승리를 보여주는 자기(애) 장애를 지닌 채, 부정적 내적대상에 사로잡혀 자신을 살아있게 도움주는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만다("그 누구도 믿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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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