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 칼럼

존재의 연속성-'나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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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연속성 'I am(나는 나이다)'


꿈 - 나는 좁은 긴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몸을 최대한 낮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전진한다. 하지만 힘들게 통과하여 창문을 겨우 지나가면 또 하나의 창문을 마주하게 된다. 헌데 주어진 과제를 풀어야 하는 것 처럼 창문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 공포스럽다. 가까스로 통과할 때마다 몸이 구겨지고 짓눌려지는 압박감에 괴롭지만 매번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나간다. 


비온은 심한 고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헐벗은 영혼'이라고 표현하였다. 살아가는 순간의 믿음이 위기에 처하는 사람이랄까. 고통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정상이라는 느낌'은 삶을 시작하는 유아의 '나는 나이다' 라는 감정에서 기인한다. 엄마가 정성을 담아 안아 줄 때 아이의 몸과 정신은 하나로 응집된다. 아이의 몸은 엄마가 하는 말로도 만들어지는데, 엄마가 말한대로 아이의 인격이 형성된다(인격은 신체와 정신이 하나인 상태이다).  '살아 있다'는 원초적 정상성의 감각은 부모로부터 받은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 경험에 기인한다. 출생 이전부터 자궁이 수행하는 역할과 아이를 안아주는 엄마 사이에 연결이 존재하는데 그렇게 정서 요소와 신체 요소는 묶여있다. 아이가 엄마의 정서 지원을 만나지 못하면 생의 시작 순간부터의 좌절로 인해 신체 이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자기긍정감도 엄마가 지원해주지 않으면 정착되지 않기 때문에 엄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다'의 존재감은 아이에게 최대한 적응해주는 신뢰로운 안아주기로 성취된다. 엄마에게 무조건적인 긍정을 받는 다는 것은 기본 신뢰감으로써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감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인정이나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오해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고민되겠는가. 무리하지 않도 손에 얻는 즐거운 일상이 있는데 헛된 이상에 사로잡혀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게 된다. 


'엘렌의 가족이야기' 는 TV다큐 드라마로 눈이 보이지 않는 니콜스 부부가 한국에서 버림받고 버려진 시각장애 아이 4명을 입양해서 키우는 이야기이다. 부부의 사랑으로 두 아이는 여러 번의 수술로 시력을 어느정도 회복해서 살고 있다. 장녀인 엘렌은 비장애인과 결혼해서 예쁜 아기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로 공무원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당당한 성실함은 신체장애가 결코 '삶의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렸을 때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좋은 지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사람으로 사는게 고통스럽고  많은 에너지를 소모당한다. 다행이도 엘렌에게 삶은 무서워서 회피해야하는 그 무엇이 아닌 듯했다. 막내인 새라는 중증장애인으로 20대의 처녀이지만 정신연령은 유아다. 기숙학교에서 생활하고 주말에 부모와 함께 지내는데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때론 정신적인 혼란으로 과격해져서 자해 방지 차원에서 헬멧을 쓰고 생활한다. 새라를 믿고 일관성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사랑해주는 니콜스 부부의 인격의 힘에 한바탕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어느 장면인가 아버지의 몸에 자신을 기대어 늘어지게 쉬는 새라의 모습에 그 아이의 '살아 있는 기쁨'이 진하게 느껴졌다. "아~ 새라는 행복한 아이구나!" 


니콜스 부부는 자기 집착이 강하거나, 애정 결핍이 심하거나, 자존감이 낮거나, 유아적인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거나, 열등감이 심하지 않았다. 자존감이 허약해서 자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자기애적 부모가 아니었다. 자기의 결핍을 메워줄 대상으로 아이들을 볼모로 잡아두지 않고,  통제하거나 지배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을 자기가 있어야 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훌훌 떠나보내는 성숙한 사람들이다. 니콜스 부부는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아무도 없는 상태의 고립이 아닌 관계속에서 있으면서 눈치보거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좋은 환경에 대한 경험과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컸다. 시각장애를 가진 6명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어떻게 살아갈까? 얼마나 불편할까? 어떤 많은 것들이 포기될까? 라는 의구심과 달리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실수와 충돌 속에서도 질서있게 살아가고 있었다. 일상으로 일어나는 사소한 좌절에 스트레스로 진노하지 않고 살아가는 니콜스 부부의 온화한 인격적인 태도에 또 감탄을 했다. 그 아버지의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받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위치와 거리감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 이 가족 그 누구도 무리해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의 함께 있는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니콜스 부부는 아이들이 한국말로 '아빠, 엄마'라고 부를 때 기쁜 자부심이 일어난다고 한다. 세상사람들은 편견으로 그를 특별한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이들 부부에겐 당연하고 평범한 일일 뿐이다. 일흔의 나이로 막내 새라의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25년이나 했기 때문에 하나도 어렵지 않고 불편하지않다고 말하는 그의 넉넉한 마음이 좋았고 고마웠다.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니콜스 부부는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잘 사랑하겠다고 한다. "사랑은 어떤 결과물을 바라지 않아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기의 기형을 '고쳐야 한다, 없어야 한다'고 느끼는 엄마와, 아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엄마가 있다. 기형적인 아이에게 삶으로 나가기 전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 경험을 한 다음에야 왜곡없이 타인에 비해 자신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에 대한 인식을 적응적인면에서 제대로 발달시킬 수있다.  


살아있다는 느낌, 자신의 신체가 정상적이라는 느낌이 있어야 자신의 특정한 장애를 위해 자발적인 치료작업도 해낼 수 있게 된다. 그 다음 주어진 삶을 인정하며 살아간다. 부모에게 받은 흔들림 없는 지원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볼수 있는 모든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것을 성공한 아이는 사실 태어나는 그 날 부터 부모로부터 조건없이 수용된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엄마도 평생 행복하다. 아이의 살아 있음이 부모로부터 긍정되었기에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그 긍정은 사랑만이 아닌 존중이다. 니콜스 부부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외부세계에서 여러 방면으로 지속적인 도움을 구한다. 따스한 감정은 인격의 타고난 잠재능력이다. 하지만 잠내능력은 유아기의 좋은 양육에 의존되어 있다. 니콜스 부부가 아이를 다루는 방식과 감정의 접촉은 고도의 인격적인 특별한 사랑의 모습이다. 부모와 자녀 모두가 서로를 위한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꿈 사례의 주인공 보라씨는 상담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살아 숨 쉬고 싶고, 살아내고 싶고,  평온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보라씨는 살아오면서 여러차례 난관과 위기를 경험했다. 버림받는 공포와 우울에 직면해서도 끈질기게 견뎌냈다. 그녀는 자신을 압도하며 밀려드는 파괴적인 힘을 이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보라씨는 주변의 세계에 신뢰감이 부족해서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약점이 있더라도 자신이 포용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안정감이 없다. 사실 가까운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약점을 드러내도 이해받을 수가 있다. 그것이 진정한 친밀함이다. 보라씨가 삶을 힘겹게 살면서 지치는데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은 주변 사람에게 적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반대로 주변 사람은 자신에게 적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보라씨의 이런 오해로 인해 그누구도 책임을 지우지 않았는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느껴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불행해지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과 사귀어야 행복해질지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보라씨의 인격의 어느부분에서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시야를 좁고 작게 보는 (좁은 창문과 같은)협착된 모습이 있다. 그 모습으로 인해 삶이 고루하게 느껴지고 변화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데 어찌어찌 노력을 해서 외부세계와 접촉을 해도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 같은 내면의 무기력상태가 꿈에 반영된 것이다. 


다행히 보라씨가 지금 관계하는 사람은 그녀에게 공격적이지도 착취적이지도 몰이해적이지 않다.  대부분 서로 도와줄 수 있고 함께 즐겁게 지낸다. 가끔 자신을 무시하고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는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예전 만큼은 끔찍하지 않다. 이제는 관계에서 서로를 좋아하고 존중하면서 파괴적일 수 있는 갈등을 잘 조절하는 법을 익혀나가는 것 같다. 이렇게 실제의 자신을 표현하고 살아가면 진짜가 늘 찾아오는 법이다. 존재의 연속성이 손상되면 외부의 기준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감정에만 몰두해 살거나, 외부 기준에만 집착해서 내적인 흐름이나 감정없이 살아간다. 보라씨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솔직해졌고, 감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표현할 수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주장을 하고 나면 보복당할 것 같은 박해불안에 시달리기도 했다. 나 아닌 것에 맞설 수 있는 능력도 존재의 연속성에서 완성된다. 외상이 크면 의식을 포함해서 그 어떤 것도 비인격화 된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배타적일 때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자기 상처와 접촉이 안된다.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내면의 증오로 삶의 에너지 역시 고갈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존재연속성과 정상성에 대한 기본 경험을 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비정상성으로 고통받는 개인은 과도하게 이상화된 정상성에 대한 기준으로 타인과 자신을 평가절하한다. 꿈꾸던 이상이나 사람에 대한 이상화가 깨지는 실망스러운 순간에 정상으로 믿었던 멋진 자신과 대상이 하찮아지기도 한다. 거기에는 어떤 좋음도 없다. 삶은 소화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살만한 것이 되질 못한다. 존재의 연속성인 정상이라는 느낌을 초기에 손상당하면 육체, 정서, 영적 차원에서도 문제가 발생된다. 악의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자신을 비롯해서 싫어하는 사람이나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원통해한다. 너덜너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을 곳이 없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고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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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