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 칼럼

페어베언의 도덕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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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방어

자신이 훌륭하고 좋은 부모를 두었다는 주장은 과거를 정확하게 반영하기보다 의식적인 방어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사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부모에 대해 원망을 갖기 마련인데(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별 어려움 없이 부모에 대한 불평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쌓인 무의식 경험)내적 부모가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사랑과 이해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복수나 거부를 하지 않고도 여러 잘못에 대해 부모를 탓을 할 수 있어요. 어린 시절을 문제 없이 보냈다거나 부모가 특히 엄마가 완벽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현실 부정에 가깝습니다.

 

엄마의 문제는 자신의 책임이라는 환상은 어린아이의 전능감에서 비롯되는데요. 정신분석에선 환상적인 욕망을 이기는 현실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울함이나 적대감도 엄마와 나름 유대감을 유지하는 것인데요.(동일시 메커니즘) 부모로부터 고통을 받으면 부모에 대한 연대감은 철옹성 같아져요. 아이는 언제나 자신의 행복보다 나쁜 부모라 할지라도 그들을 더 중요시해요.

 

정신분석가 페어베언의 말처럼 불행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치르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엄마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한 사례자는 정말 많아요. 헌데 이들은 하나같이 엄마의 이기적인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느라 자신의 욕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부모에 대한 이상화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은 늘 지나치게 많은 것을 주고 적게 되돌려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먼저 엄마, 그 다음으로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형제관계부터 사회적관계까지)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아야 자기애가 제대로 발달해요. 헌데 자신이 부모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높은 사회적 지위, 화려하고 편한 생활, 더 많은 인정과 행복등에서요. 하지만 언제나 자식이 부모보다 더 잘 되는 게 인지상정이에요. 물론 부모가 먼저 자식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해요. 아이가 부모의 나쁜 측면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부모가 정서적으로 결핍을 주거나 침범을 하면 아이는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요. 이때 페어베언의 도덕적 방어라는 개념은 아이가 부모의 나쁜 측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설명해줍니다. 아이는 끝까지 부모의 이미지를 보호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데요. 대신 부모의 해로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옵니다. 유아는 부모의 세계속에 살아가고 있기에 부모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이거든요. 그래서 누구나 사랑받지못한 것을 인정하는 게 어려워 자신의 부모를 좋은 대상으로 유지합니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부모의 선함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부모의 나쁜 측면을 분리시키는 방법입니다. 사랑에 인색한 부모라도 아이는 평생 강하게 집착하는데요.(효도) 자기 멸절의 경험때문에 부모를 좋은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진실되게 아이와 가깝지 않으면, 사실 아이는 거짓 감각을 만드는데 뭘 열심히 해도 잘 느낄 수가 없어요. 황혼 이혼을 한 어머님이 라디오에 나와 자식에게 걱정시켜줘서 미안하지만 자신은 잘 살 수 있고, 변함없이 사랑하고 변하는 것은 없다고 안심하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니 미워하지 말고 잘 지내라고 부탁하던데요. 자식의 사랑이 나쁘게 변질되지 않게 만들어주는 건강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페에베언은 도덕적 방어를 설명하기 위해 나쁨을 절대적 나쁨과 조건적 나쁨으로 구분하였어요. 절대적 나쁨은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이고(죽음과 같은), 대상을 조건적으로 나쁘다고 말 할 때 그것은 도덕적 관점에서 나쁜 것이에요. 누구나 나쁨을 바로 잡기 위해 자신의 좋은 대상을 내재화하는데요. 내재화된 좋은 대상은 초자아의 역할을(도덕적 지도) 떠맡아요. 물론 유아가 나쁜 대상에 저항하게 되면 초자아의 관점으로 볼 때 도덕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유아은 내재화된 부모에게 저항하지 못해 나쁜 대상과 관계하며 그 자신이 나쁜 자기로 살면서 내재화된 부모의 좋은 측면인 좋은 대상에게 판단을 받는거예요. 학대한 부모를 용서하고 그들에게 돌아가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그러하지요. 즉, 신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서 죄인으로 사는 것이 악마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서 죄인으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신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는 안정감이 있으니까요. 그런 세상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초록씨는 직장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맞추고 서비스하기에 남에게 욕먹는 일이 없어요. 동료와 식사를 하러갈 때도 그녀는 식사비를 먼저 내고 커피까지 사는 경우가 많아요. 누군가 왜 그리 남 부탁을 다 들어주며 맞춰 주냐고 물으면 그래야 양심적으로 느껴지고, 거절하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 죄책감이 느껴져서라고 합니다. 초록씨는 부모님을 돌보는 일을 비롯해 집안의 대소사를 혼자 떠맡고 있었는데 형제들은 역시 모른 척하고 있었지요. 일하는 능력도 우수하고, 책임감으로 인정을 받는 편이지만 실수나 지적을 받으면 그 일을 쉽게 잊지 못하는데요. 이런 강박적인 과잉활동이 지나칠수록 내면의 진정한 가치나 흥미로부터 멀어지는 거예요.

 

사실 초록씨는 사실 현재 대인관계에서 유아적 모습(전능환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대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이 피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받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처음엔 부모를 그리고 현재는 주변의 모든 대상에게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도덕적 방어를 하는 것입니다. 초록씨가 보이는 지나친 배려는 부모의 자기애적인 욕구를 충족해주었던 모습이지요. 이런 헌신은 사실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운 자신의 일로 느끼기보다 의무로만 느껴지겠죠?

 

초록씨는 이득이 적은 행동을 중지하고, 그것보다 때론 가치 있는 것에 삶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방법을 고려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신념은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단순한 신념이에요. 타인에게 분노를 표현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이러한 분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선을 긋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자신을 돌보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지요. 억압은 심리구조를 만드는 핵심요소인데요. 견딜 수 없고, 의식이 수용할 수 없는 대상은 억압되어 분리될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억압되는 것은 불쾌한 기억이나 욕망에 앞서 나쁜 대상 그자체에요. 힘들었던 외상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많은 사람이 저항하는 것은 그 경험 자체가 나빠서 그래요. 즉 나쁜 대상과 그 관계가 수치스럽다는 것은 동시에 자신이 나쁘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누구라도 억압된 나쁜 대상이 없는 상태로 유년기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페에베언은 진짜 나쁜 부모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을 연구하면서 보니 이들은 평생 부모를 진심으로 욕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어요. 좋은 대상으로 유지하고 싶은 소망때문에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이 반사회적인지 정신병적인지 정상적인지는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심하게 나쁜 대상이 억압되어있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어요. 나쁜 대상관계도 그러하지만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신의 자아구조도 억압되는데(현실에 적응하는 자아) 이런 과정에 의해 자신의 성장이 제한되고, 자기표현이 축소됩니다.

 

프로이드는 억압된 본능이나 상처는 항상 의식으로 올라오려고 한다고 했어요. 무의식 상처가 돌아오는 것은 심리적으로 취약할 때, 인격을 재조직하고 통합할 필요가 있을 때 일어납니다. 잠깐의 번득이는 성찰은 실제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각성은 오랜 세월 동안 추적된 통찰에서 나옵니다. 삶이 변화하기위해서는 기존의 것이 깨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져야 해요. 발달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기존의 자신이 무너지는 경험을 겪으면서 더 유연해지고 새로운 경험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억압한 것이 회귀하면 무엇이든 좋았다가도 나빠지는데요. 타인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무기력한 시절에 경험했던 불안과 공포가 다시 드러나기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갈등을 참아내면서 진짜 제대로 외부대상 경험을 해보면 상상했던 것과 달리 편안해지면서 무기력한 의존적인 아이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요. 거부대상 경험이나 이미지는 사랑과 모든 필요에 대한 신뢰를 배신하는 존재입니다. 외상이 상징적인 형태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되면(성찰과 교류) 개인의 공격성은 내재화된 악마적 부모대상과의 관계에서 직면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전치될 때는(옮겨질 때는) 현실 인물에서 재연되지요. 많은 사람은 알게 모르게 나쁜 대상들과 비슷한 사람을 새로운 사랑 대상으로 선택해요. 자신의 걱정이나 근심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경험이 불가능했던 경험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는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와 다른 상처를 받아요. 자기애적인 결핍이나 사랑관계를 파괴하는 것, 낮은 자존감의 상처를 견디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도덕계에 들어가기 위해 겪는 고통입니다. 대상복구는 친절하고 따뜻한 신뢰하는 경험을 꾸준히 해나가야 일어납니다. 누구나 대상의 그늘, 손상된 자기대상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해서 우울하고 화내는 빈곤한 자아가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좌절이나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담이나 정신분석 공부를 하러 오는데 그 무의식적 동기는 자신의 내적 대상을 바꾸고 싶어서 그러합니다. 이들의 절실한 내적 동기는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 안에 좋은 대상을 복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욕구가 있어요. 긴 심리치료를 이겨내는 것은 아마도 대상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즉 자신 안에 사랑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기 하나만을 위해서라면 몇 년이라는 치료 시간을 견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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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