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후기

기타 클래스그들이 함께 엮을때

1. '진심으로 그들이 엮일 때’                             다이아 몬드님       


극중‘히로미’는 자신의 딸‘토모'를 방치한 채, 남자와 동거를 하기 위해  말도 없이 나가버린다. 이러한‘히로미'의 행동은 계속 반복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외삼촌‘마키오'는 자신이 일하는 서점에 갑자기 찾아온‘토모'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만화를 보면서 기다리던 ‘토모'는 일을 끝낸 ‘마키오'와 그의 집에 같이 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삼촌에게 이상한 동거녀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트랜스젠더인 ‘린코'이다.‘토모'는 다행히 여성성이 충만한 ‘린코'로 부터 엄마에게서 받아야할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리고‘마키오'와‘린코'와 함께‘뜨개질’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감 또는 연대감을 엮어낸다. 아동은 자신의 정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양육자의 표정을 통해 사랑, 공포 등의 감정을 배운다고 한다. 아동의 욕구에 대한 양육자의 반응이 충분할 때, 아동의 민감한 정서 발달이 가능하며, 양육자가 아동의 욕구를 거부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면 아동은 다른 사람과 정서적으로 접촉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된다. 인간적 접촉을 위한 아동의 노력이 반복적으로 좌절되면 아동은 신뢰감을 형성하지 못해 외부세상을 황폐하고 가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양육자와 아동의 상호이해와 감정의 공유는 안정된‘자기 개념’형성에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개념이란 개인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한 개인적 특성에 대한 지각이나 느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토모, 마키오, 린코가 단단히 엮어놓은 신뢰감을 상상도 못하는 엄마‘히로미'가 돌아와 이번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토모'를 데려가려 한다. 토모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녀는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자기 개념이 형성되지 못하면 타인과의 관계까지 발전하지 못한다. 영화‘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를 통해(특히 엄마 ‘히로미') 나의 관계 패턴에 대해 몇 가지 발견한 점이 있다. 일단 나는 내가 먼저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도 모를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이런 나의 태도에 누구든 그/그녀는 나에게 상처를 받는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그/그녀는 나에게 상처를 준다. 이러한 순간 나는 마치 생뚱맞게 심리적 테러를 당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연히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하는 사람(수동 의존적)인데, 가만히 있다가 모욕을 받은 격이 되는 것이다. 이 때 누군가는 나에게 공격성을 쓸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러지 못하고  실망하고 상당히 의존적으로 변한다. 다시 또 수동의존적인 모습으로 그/그녀에게 사랑 또는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열등감으로 내가 왜 그들에게 맞추지 못하였는지 고민하다가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모든 일들이 어그러진 다음에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상태는 너무나 끔찍하다. 요새 특히 곤란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일신상의 여러 어려움을 감수하질 못하는 문제행동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나는 실패하거나 비난받을까봐 매사 미리 상황에서 일어나는 반대, 거절을(확실한 표명)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피한다. 그 결과 부정적 자기개념이 강화되어 더욱 고립감으로 무력하다. 수동-의존적인 문제가 나에게 매우 커서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타인에게 순응적인 행동을 하다가 낭패를 보는 이 패턴에서 언제, 얼마만큼 벗어날 수 있을 지 고민이다. 다른 사람의 조언과 확인 없이 결정을 내리기 어렵고,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대부분 다른 사람이 책임져주길 기대한다. 지지나 승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기가 어렵다(단지 보복이 아닌). 분석을 통해 동기나 능력이 부족하다기보다 현실적 판단력과 자신감부족으로 많은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지만 조절이 어렵다. 얼마 전엔 아무런 숙고 없이 교수님이 어떤 장애단체를 후원하는 모임에 가입하라는 말에 바로 가입해 후원하고 나서 그 단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인식하고, 생각지도 못한 책임감을 떠맡아 불쾌했었다. 수동-의존적이라는 것은 아이가 비난받을 지 관심 받을 지는 엄마의 기분이 달려있는 상태를 뜻한다- 한 순간 교수님에게 관심을 받기위해 내 의견에 솔직하지 못했는데, 늘 누군가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결정해버리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이아몬드님, 실패나 거절이 두려워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고민을 표현 했네요. 여기에서 벗어나는 확실한 방법이 있지요. 좌절(실수나 시행착오)없이 자아는(자기) 성장되지 않아요. 당장 누군가에게 어떻게 할까 도움을 청하기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한 다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자아의 또 다른 높은 수준이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표현할 줄 알아야 발전적인 성찰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근거로 현실적 판단을 제대로 하게 되면 공망(空亡)사라져요. 자신감은 뭐든 스스로 해내서 느껴지는 감정이랍니다. 



2. ‘뭔가 이유가 없으면 안 되는 건가요?’ -로즈쿼츠님


무엇이든 꼭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바쁘게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정신없는 삶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무의식 욕망을 건드리는 영화가 바로 ‘안경’인 것 같다. 영화는 그냥 한없이 단순하고, 더 이상 보탤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을 자아낸다. 이유 있는 일을 찾아 강박적으로 행동하고, 가치를 판단해 평가하고야 마는 쉼 없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꾸미지 않는 단순한 맛의 작은 행복을 느끼는 팥빙수가 참 귀하게 느껴졌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조용한 바닷가에 캐리어를 끌고 이렇다 할 간판 없는 숙소를 알아볼 수 없는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온 타에코, 맘씨와 음식 솜씨 좋은 민박집 주인 유지와 매년 찾아오는 수수께끼 빙수 아줌마 사쿠라, 시도 때도 없이 민박집에 들르는 생물 선생님 하루나, 이들은 모여 기이한 체조를 하는가 하면 특별한 일이 없이 하루를 보내는데 그들에게서 비춰지는 (나에게 없는)여유로움과 편안한 자유가 끝없이 펼쳐지는 평화로운 바다와 같았다. 끊임없이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허망이나 절망으로 쫓기는 고달픈 삶이 아닌 진정으로 사색할 수 있는 여유로움과 자유일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작은 일거리를 찾아 하고 그리고 사색하는 모습은 참으로 단순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나에게 있는 타에코의 모습은(강박적으로 오전에 일을 하고 낮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는) 어떤 걸까 생각해본다.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선생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는 그러한 역할 속에 자부심이나 기쁨, 감사함이 있나? 여유가 있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허기진 마음과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기 위해 가지고 싶은 물건을 마냥 채우고, 다시 가치 없이 버려버리고, 또 채우기식의 무의미한 쫓고 쫓기는 삶이 바로 내 인생이다. 삶을 견뎌내고, 욕심을 비우고, 가치를 간직하는 여유로운 자유를 원하고는 있지만 그저 소망으로만 기대할 뿐이다. 나는 대인관계와 정서가 불안정하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상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충동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때론 자존감이 훼손될 때도 있는 것 같다. 누구든 이상화를 했다가 작은 거부 행동이나 실망으로 평가절하 해버리는 불안정하고 극단적인 인간관계를 해왔다. 오랫동안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알아낸 것은 이 모든 게 나의 약한 자아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거다. 감정 기복이 심해 불쾌함을 경험하면 그 염려가 몇 시간 드물게는 며칠씩 계속된다. 그다음에는 만성적인 공허감이...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선입견 없이 느끼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힘 있게 주체로 서 있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한결같게 대해줄 때 나는 감정기복에 덜 휘둘리고 편하게 기능한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경험되는 민박집과 여러 인물의 상징적인 의미가 상담스터디 관계로 연결된다. 내가 모르는 사이 주체 없는 삶에 휘둘리고 있다면, 봄마다 돌아와 간결한 맛의 여유와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함께해주는 사쿠라와 사색을 돕는 유지, 하루나를 만나는 타에코처럼 우리 스터디에서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만나고 싶다. 항시 시달리고 있는 애착과 분리의 혼돈을 벗어나 작은 자극에도 불안정해져 지옥을 경험하는 마음대신 이 스터디라는 휴양지에서 내 본연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마주하기 기대해본다. 약한 자아가 주관적 무드에만 빠져있지 않게 하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알아가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나의 주체도 바로 서겠지. 나 혼자 고립된 세상은 늘 버겁게 느껴지고 불안정한 카오스의 세상이지만, 사실 현실은 하나하나 차근차근 대면하면 언제나 해결할 방법이 있는 논리적인 세상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의지와 관계없이 올바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숨어버리거나 쫒기는 환상 속에 빠져드는 파괴욕동으로 모든 걸 쏟아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자동적 정신 메커니즘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서두르는 조급함 없이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교정 받는 기회를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힘을 기를 수 있다면 하는 바람과 타당한 이유 없이도 무난하게 살아가는 현실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되었다. 



3. 그들이 함께 엮을 때와 안경을 보고 -루비님


토모의 엄마가 딸을 잊고, 자신의 인생의 보충(구멍)을 메우기 위해, 남자들에게 매달려 사는 삶을 보면서 나를 보는 것 같아 심히 불편했다. 엄마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나 자신의 인생 구멍(엄마)을 메우겠다고 공부에 매달려 석사 3개를 하고 박사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늘 내 몫을 정당화하였기에 아이와의 관계가 늘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엄마는 친정 일에 엮여, 그 책임을 혼자 감당하느라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선택하느라 나를 잃어버렸다. 할아버지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지기위해 장녀인 엄마는 나의 생후 일 년 동안을 감옥에서 지내셨다. 자아능력은 커녕 감각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아기가 느꼈을 버려 진 공포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느꼈을 수치감이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엄마를 잃은 상실감이라는 어마어마한 구멍에 추락하는 공포로 나 또한 세상과 제대로 접촉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나는 엄마를 일 년 후 다시 만났어도 엄마를 생생하게 느끼질 못했을 것이다. 엄마 또한 측은한 마음과 달리 내가 낯설고, 어렵고, 버거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또 엄마 자리를 아빠가 차지하지하고, 그 자리를 쉽게 내어주지 않아서 엄마는 많이 외롭고 불안했을 것 같다. 어른의 시간으로 일 년 동안 잠시 떠나갔다가 돌아왔지만 엄마는 평생 그 자리로 딱 맞게 들어오질 못하셨다. 대신 나를 자신으로 착각하는, 자기애의 연장으로 한 없이 불쌍히 여기고 뭐든지 다 해주셨는데 늘 무엇이 필요하기도 전에, 말도하기 전에 내 앞에 좋은 것들을 갖다 놓으셨다. 


아빠 또한 엄마 자리에서 날 위해 세상을 사셨다. 하지만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아빠 때문에 자신이 엄마라는 이름을 주장하지 못하고 내 곁에 맴돌았고 그 결과 다시 나는 엄마가 없는 아이가 되었다. 나는 엄마, 아빠의 관계에서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채고 엄마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했고 심지어 ‘엄마가 계모인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런 나는, 아빠가 없어 아빠의 성정체성(남자)을 알지 못하고 자란 린코처럼 아빠가 있으나 엄마역할을 하는 아빠를 보면서 엄마의 정체성을(모성성) 획득(답습)하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의 자리, 그리고 부모의 자리의(경계) 모호함이 정체성의 혼란까지 이어져 인간관계에서 부모의 관계가 분별없이 재현되었다. 사랑받지 못한 감정이 억눌려 있고, 나 자신이 한 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져 부정적인 평가에 민감해서(사람사이에 일어나는 양가감정을 사용하지 못해서) 자연스럽고 절제된 친밀한 관계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잘해줘야 할 것 같아(사실 어느 정도까지 인지 알 수가 없다), 물질공세로만 마음을 표현했었던 것 같다. 엄마와 제대로 공생 관계를(의존) 갖지 못했기에 사실 아빠와도 불안정한 어정쩡한 관계로 삼자 관계를 획득하지 못했다. 린코처럼 아빠의 부재로 남자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해 엄마가 자신에게 준 경험으로 남자인 토모가 엄마역할을 기막히게 잘해내는 것을 보면서 내가 투사가 되었다. 나 또한 일하고 공부하는 남성적 역할이 조금은 더 자신이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닌 정확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원인 모르게 자신감이 위축되어 부정적인 상황이나 모습에 압도당해 반응하며 제대로 된 대상 확립을 하지 못해 아빠를? 엄마를? 뭐가 맞는지 늘 혼란스러워 아이가 됐다가, 어른이 됐다가 만 한 것 같다. 아이들의 발달시기마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을 때 아이들과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친밀한 관계는 계속 억압 회피되었던 것 같다. 이유 없이 자신이 없었고, 두려웠고, 버거웠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이 탄로 날까봐 무장하고 방어하느라 온몸이 경직되어 살아가는 영화 안경의 코바야시 사토미를 보면서 그녀의 방어벽에 또 내 모습이 투사되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섞여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홀로 있을 섬을 찾아 그곳에 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과 관계가 친숙해지면서 방어벽이 흐물흐물하게 되고 그것이 해제되었을 되었을 때는 불편함, 어색함, 저항감에 온 몸을 떨며 다시 한 번 방어벽을 두르고 무장하는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다행이도 그녀는 어느새 말도 안 되는 춤동작을 따라하면서 키득거리게 되었고, 별 것 아닌 팥빙수가 신기하고 좋은 음식으로 느껴지는 세상에 젖어들게 되었다. 달콤한 팥과 갈아진 얼음이 입안 틈새로 들어오는 것이 세상이 그녀 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여겨졌다. 점점 세상이 좋아지고, 재밌어지고, 살맛나는 전율을 느끼면서 춤을 함께 추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자연스러운 관계 속의 한 사람이 되고 편안해진 사토미가 힘 있게 느껴졌다. 나도 이제는 조금씩 세상이 좋은 것 같고 재미가 있다. 아주 특별하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빠 엄마의 한으로 내게 그렇게 살길 바라던 삶이 투사된 것일 뿐 이다. 나는 이제 특별한 것이 아닌 무난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 



4. 진정한 관계를 꿈꾸며(탄자니아님)                                    

 

아동기 발달 단계를 보면 각 시기마다 성취해야 할 목표들이 있다. 각 단계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생애 고비마다 직면하는 많은 상처와 문제들로 고통스럽고, 때로는 회복할 수조차 없는 좌절들을 경험하게 된다.‘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는 등장인물들이 성장과정에 생겨난 결핍과 상처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물 및 관계 구도를 살펴보면 바람 핀 남편에게 받은 상처와 원한을 딸에게 쏟아낸 토모의 할머니, 그런 엄마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자라 자신의 딸에게 적절한 양육과 사랑을 줄 수 없는 토모의 엄마 이야기와 아들의 성 정체성의 혼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지지해 주었던 린코 엄마, 정체감 혼란과 사람들의 편견에 상처받았지만 엄마의 사랑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간직하고 있는 린코 그리고 아버지 대신 자신에게 집착했던 엄마 관계를 극복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로 린코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토모의 외삼촌 이야기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 토모엄마 같은 엄마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제공한 그녀 나름의 모성은 대부분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우리 엄마는 성취와 재능을 과장하고 무엇이든 뛰어나게 여기지기를 기대하시는 분이다. 성공, 능력, 탁월함 등의 이상적인 사람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시다. 가족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자신이 매우 특별하다고 느끼시는 분이라 그런 기대가 반드시 채워져야 하며 자식을 비롯해서 특별히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부터 충족되거나 인정을 받으셔야 보람을 느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모습이 지나치실 때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상황 그리고 필요를 알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타인의 입장에서 그를 위해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엄마는 오롯이 나를 위해 옆에 있어주거나 나만을 위해 헌신을 해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나는 뭐가 갖고 싶다거나 먹고 싶다고 조르거나 투정을 부린 적이 없다. 그녀가 주는 것에 감지덕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일이다. 엄마는 중요한 자리에 초대를 받은 사람처럼 옷을 갖춰 입고 손님처럼 병실에 앉아 계셨다. 마냥 위로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지만 엄마의 차가운 모습이나 행동 때문에 이 모든 마음을 숨겨야만 했었다. 그 아픈 와중에 위로는커녕 어찌나 거리감이 느껴지고 불편하던지 남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다. 문병 오는 시댁 식구와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만 그 자리에 계신 엄마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지만 지나고 보니 씁쓸하다. 내가 안쓰럽고 힘들까봐 부축해 준다거나 밥을 챙겨주겠다는 생각은 없으셨고 나 또한 엄마에게 뭘 부탁하지도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나는 괜찮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수술 다음 날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닫으면서 엄마의 온도를 맞춰주면서 내가 더워서 연다고, 혹은 추워서 닫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엄마는 평생 나에게 중요한 인격적인 실체가 아닌 늘 좋은 엄마, 좋은 지식인, 좋은 아내로 보여 지기 위한 쇼를 하는 사람으로만 느껴졌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분이셨지만 나에게 너무나도 센 엄마였기에 나는 엄마가 너무 무서워 평생 그 어떤 대립도 피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주체성 발달의 기회를 박탈당한 나는 엄마의 욕구가 곧 나의 욕구가 되고, 엄마의 감정이 나의 감정이 되어 대인관계와 정서가 불안정한 채로 살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역시, 진정한 감정이나 나 자신의 필요에 둔감하고 명확한 자기표현이 너무 힘들다. 대신 부모, 형제 그리고 시댁어른들과 남편 그리고 자식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들의 중요한 무엇이 되고 싶어 애를 썼으며 그것으로만 나를 규정하려고 하였다. 혼자서는 제대로 진정한 자신이 되질 못 했다. 


나는 채워지지 못한 애정을 평생 숨기며 살아왔는데, 그것은 매사 거절당했다고 생각되는 상황의 오해를 만들어, 사랑하고 사랑해 주어야할 대상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를 쏟아낸 후 불안이 진정이 되면 그들을 숨 막히게 하는 헌신을 쏟아 부었다. 버림받는 공포 때문에 내가 쏟아 낸 증오를 보상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며 매달리고 집착하는 관계를 반복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엄마나 그 누구를 대신해서 살고 싶지 않은 각오로 노력중이다. 내가 겪어온 이 피해의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거절에 대한 두려움에서 불안한 나를 전혀 보호하지도 못하고 불안과 분노로 살아가고 있겠지. 진실을 알아가는 만큼 조금씩 힘들었던 마음이 진정이 되고, 정리가 되고, 힘이 되고, 성취가(성공이) 일어난다. 영화로 돌아가 보면, 토모는 자신에게 사랑과 헌신을 진심으로 보여주는 린코를 통해서 엄마에 대한 미움 대신에 엄마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통하여 성장해 나가고 있었고, 린코는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사회적인 편견을 극복하고(털실로 짠 남근을 불태우는 애도를 통하여)혈연 대신에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헌신으로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성숙한 어른의 사랑을 보여주는 마키오다. 같은 엄마를 경험했지만 누나인 토모엄마와는 달리 성장-발달을 지속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엄마를 돌보아주는 헌신적인 린코의 모습에서 인간의 성숙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린코를 사랑하고 그녀의 애도에 동참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성장에 어떤 사람이 있었을까, 어떤 방법이 있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가 보여주는 성취는 좋은 본보기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5.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진주님)

                                                                     

   나는 분노가 많은 사람이다. 정당한 분노도 있지만 내 안에 ‘욱’하는 억압된 분노가 많음을 이번 과제를 통해서 발견했다. 치료하는 아동의 엄마들과 상담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엄마의 태도에 대해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직장에서 케이스 스터디를 하다보면 아이에게 적절한 언어자극을 주지 못하고 방치했거나 정서적으로 억압시켜 부모 눈치를 보고 위축되어 표현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의 부모에 대해 흥분하며 말과 온몸으로 화를 내곤했다. 반면 다른 치료사들은 그저 안타깝다 정도의 반응이어서 늘 그들을 정 없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영화 속의 토모가 돌아온 엄마에게 “린코는 밥해줬어. 인형도시락도 싸줬어. 머리도 예쁘게 따줬어. 뜨개질도 가르쳐줬어. 함께 자기도 했어. 왜 엄마는 해주지 않는데?” 라며 자신의 분노를 말로 표현하는 그 부분에서 순간 깨달았다. 아이는 정서적 방치와 폭력적인 일을 당해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엄마 손을 꼭 붙들고 “저는 엄마가 좋아요”라며 일상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그 아이들에게 내 어린 시절을 투사하고, 부모 모습을 투사하여 그토록 화가 났음을 알게 되었다. 토모가 빈번한 엄마의 가출로 외삼촌 집에서 살게 되었다면, 나는 초등학교 때 방학 때마다 친가에 보내졌다. “엄마 방학인데 어디 안가? 반찬이 이게 뭐야? 이거 해줘 저거 해줘” 방학이면 이렇게 충족하고 싶은 것에 대해 늘 불평불만을 하며 집요하게 요구했고 그러다가 엄마한테 혼나면 늘 동생들을 괴롭혔기에 엄마는 쫓아내는 심정으로 나를 할머니 댁에 보냈었다. 할머니 댁에서는 혼내지 않는 작은 엄마와 첫 증손녀라 예뻐하시는 증조할머니, 고모들 사이에서 욕먹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편하고 좋았다. 또한 엄마가 고모들과 사이가 안 좋았기에 엄마가 얼마나 나쁜지 욕을 하면 그 때마다 고모들이 ‘니네 엄마 못됐다고 어쩜 그러냐고’ 내 편이 되어주었기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 한 번씩 죄책감에 엄마 보고 싶어 조용히 울기도 했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내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 “작은 엄마가 너한테 뭐라고 안 해? 먹을 건 자기 애들하고 똑같이 줘? 엄마 욕은 안 해? 냉장고에 먹을 거 많지? 욕심만 많아서 너 집에 오는데 가서 먹으라고 뭐 안 싸줘? 엄마 아빠 얘기는 안 물어봐? 물으면 안 싸운다고 해” 하지만 엄마가 궁금해 하는 것 안에는 나는 없었기에 속상한 마음에 묻는 질문에 다 반대로 답하다가 버릇없다고 혼나던 시절이 있었다. 토모는 “엄마도 아니면서”라며 엄마에 대한 분노를 린코에게 옮기며 벽장 안에 들어가 거리를 둘 때도 린코는 컵으로 전화기를 만들어 소통하면서 토모의 마음속 상처를 담아 주려했고, 속상할 때나 화가 날 때 뜨개질을 하면서 분노를 다른 방법으로 성숙하게 처리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토모의 분노를 담은 뜨개까지 합쳐 108개의 남근 모형 뜨개에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실어 태우는 리츄얼에서 토모의 외할머니가 분노를 담아 뜨개질 옷들에 원한을 실어 남편의 관에 넣어 태운 것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그 성숙한 애도의 태도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어린 시절 감정의 그릇이 차서 넘치기 전에 조금씩 버리거나 덜 담도록 분노를 다루고 조절하는 방법을 엄마에게 배웠다면 좋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부모교육에서 감정발달이 후천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부모가 아이게 직접 감정조절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가족 간에 감정조절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운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감정발달이 적절하게 발달되지 않아 감정조절에 미숙하다면 아이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화가 나는 감정은 사실 에너지다. 그 정도를 들여다보면 화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걱정도 있고, 관심 받고 싶음도 있고, 미안함도 있고, 당황스러움도 있고, 불쾌감도, 배고픔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거나 표현하지 않고 한데 똘똘 뭉쳐져 분노로만 상대방에게 던져버리고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화가 나면 어떻게 성숙하게 처리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토모 같은 엄마가 없었다. 대신 물리적인 힘으로 누르는 엄마가 있었다. 그럼 나는 또 당한대로 내 동생들에게 똑같이 되돌려주었고 동생들에게 함부로 하는 내 태도가 정당하다고 여겨졌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거의 스무 살까지 10년 넘게 써온 일기가 있는데, 일기장에 엄마 욕을 썼다.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나, 왜 이런 집에서 나는 태어났을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엄마가 늙으면 절대 엄마가 죽든지 말든지 안 간다는 말도 썼다. 그렇게 불안과 분노를 다 쏟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또한 감정분출의 통로이긴 했으나 맹목적인 ‘욱’상태가 재현된 거라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해소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공격적인 감정은 강렬하게 느껴지기에 어떤 다른 감정보다 강하고, 항시 먼저라서 내 입장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것에는 능숙하나 듣는 것엔 미숙하다. 늘 내 감정표현을 하는 게 우선시되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포착하지 못한다. 치료아동과 그 부모의 관계 양상이 마치 그것만 있는 거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란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갖고 있는 분노가 삶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어떻게 드러나는지, 나와 내 유년기부터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억압된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친밀한 관계를 망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면의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내 삶의 질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6.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사파이어님)              


정리되지 않은 엉망인 집, 쌓여있는 삼각 김밥 포장지들과 라면 용기들, 사랑을 찾아다니며 술에 취해 밤늦은 시간에야 들어오는 토모의 엄마는 토모를 낳았지만 전혀 돌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성 정체성의 어려움으로 아픔이 있지만 묵묵히 견디면서 살아가는 린코는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한 토모에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좋은 돌봄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린코의 엄마 나오미도 인상적이었는데 린코를 부끄럽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키오가 린코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모습도 소중해 보였고, 린코가 토모의 결핍을 채워주며 아픔과 상처를 이해해 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진심과 따뜻함이 무엇인지 알았다. 토모엄마는 토모를 데리러 마키오 집에 갔다가 린코가 토모를 입양하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인간으로서 어른으로서 아이를 지켜야한다는 말에 토모 엄마는 자신은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고 혼자서 애를 키우다보면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는 거라면서 자기의 입장을 당당하게 얘기하고, 린코를 외적으로 보이는 데로만 평가절하하며‘평생 엄마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나는 사랑을 찾아 방황하며, 아이를 책임지는 것이 버겁고 힘이 드는지 또 자신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얘기하는 토모엄마가 저절로 이해가 된다. 


린코가 토모를 위해 정성들여 싸준 도시락이나 가족을 위해 준비한 정성스럽고 정갈한 음식을 보면서 예전의 꿈이 떠올랐다. 학교를 가려고 도시락을 찾았는데 엄마는 도시락이 없다고 한다. 무표정하고 무관심하게 우두커니 서 있는 엄마에게 도시락을 안 싸주면 어떻게 하냐고 원통해하는 꿈이다.‘도시락’은 어찌 보면 아이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그것을 내게 주기 거부하는 엄마의 상태는 어떤 것이었을까? 돌봄의 결핍이 큰 나는 여러 가지 인격의 문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지 않기도 하고, 관계에 대한 피곤함이 커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꿈속의 엄마와 같은 모습이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간혹 힘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베푸는 좋은 것을 그/녀가 나에게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능력이 되잖아 ~ 그러니까 당연히 참아주고 계속해서 채워줘야지.....끝까지 하라구!). 누군가 좋은 것을 베풀면 함께 나누는 것이 맞는데 난 노력이 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열등감, 시기심에 시달리면서도 급격히 우월감이 일어나 그들을 존중하고 이해하거나 사랑하는 게 하찮게 느껴진다. 이러한 이중성에 압도적으로 빠져 결국 관계 결실을 맺지 못한다. 자아 전능감 상태에서(초기 유아상태) 현실을 만나야 내려올 수 있는데, 사실 현실과 대면하면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 수치심 때문에 방어가 일어나(ego inflation) 관계를 망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엄마에게 제대로 진심이 느껴지는 사랑을 받지 못 해서 그러하다. 


나는 대인관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도시락 꿈처럼 나는 사람들과 무관심을 주고받을 뿐더러 거기에 엄마의 왜곡된 인식과 비정상적인 행동,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나 자신과 관계된다는 의심과 피해망상, 이상한 믿음이 강하고(마술적 일차적 사고, 종교적 맹신 등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 또한 편협하다. 평생 엄마도 나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살피기보다(반성하는 능력이 없다) 회피를 일삼으니 소외감과 고립은 엄청날 수밖에 없겠다. 정서가 잘 발달된 사람은 자신의 감정도 잘 포착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도 잘 이해하고 수용한다고 배웠다. 어린 아이기 때문에 미숙할 수밖에 없는 여러 모습을 엄마에게 제대로 수용 받아 본적이 없어 의존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채 자라왔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객관적으로 그 어떤 감정적 위로와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다. 선생님과 분석을 오랫동안하면서도 이 무의식적 역동 때문에 의존을 하고 싶어도 뭔지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미성숙함을 수용 받는 게 수치스러웠다. 의존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아 갖게 된 가장 큰 피해는 분노조절의 어려움이다. 나는 서운한 것도 분노로, 슬픈 것도 분노로, 소외감도 분노로, 외로움도 분노로 온통 모든 것을 분노로 느낀다. 나의 유년기의 성장과정, 부모와의 관계는 아직 안개처럼 그 정리가 희미하다. 내가 엄마에게서 배운 대로 하고 있든, 엄마가 싫어 반대로 하고 있든 한이 맺혀 매사 과잉 반응하는 나에게서 빨리 자유롭고 싶다. 선생님은 행동이나 미숙한 감정이 바로 고쳐지지 않아도 후회하는 마음과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차츰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후회하고 돌아보는 사람은 반드시 바뀐다는 믿음!


이번에 과제로 하게 된 두 편의 영화와 지난 번 과제로 했던 바닷 마을 다이어리는 ‘관계’에 대한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해준 영화인거 같다.‘안경’이란 영화는 융합적인 강렬한 만남만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나에게‘저런 것도 관계라고 말 할 수 있나?’하는 생각도 하게 했지만 거기엔 진심, 신뢰, 친밀함이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왠지 우리‘함께라면’모임이 비슷한 거 같다고 느꼈다. 또한 토모와 린코가 서로를 이해해 가며 점차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따사롭게 느껴지고 나에게도 저런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간절하게 해본다. 영화를 보면서 혈연으로 묶여야 가족이라고 할 수 있던 생각에서 벗어나‘얼마든지 새로운 가족들을 만들 수 있는 거구나’하는 생각도 드니 참 좋다. 나한테 이것만큼 의미가 있는 일도 없는 것 같아 스터디 모임을 통해‘관계’에 대한 나의 부족함을 일깨우고 새로운 나의 가족들을 만들어 보겠다는 목표도 세워본다.   



7. <우리가 함께 엮을 때> 오팔님


“우리가 함께 엮을 때”를 보면서 부모교육에서 배웠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영화중에서 두 가지 상징물이 유독 마음에 남았는데, 첫 번째는 편의점 삼각 김밥이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 아이는 편의점 삼각 김밥을 우걱우걱 삼키고 있었고, 삼각 김밥껍질이 무수히 쌓여진 쓰레기통을 보며 아이가 매 끼니를 삼각 김밥으로 때우고 있었음을 짐작 되었다. 아이에게 삼각 김밥은 나쁜 엄마와 나쁜 엄마관계를 상징한다. 외삼촌의 여자친구(린코)를 만나기 전 진짜 보살핌과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 나쁜 사랑이 독이라 할지라도 그냥 삼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린코의 참사랑을 경험한 뒤에는 아이는 더 이상 삼각 김밥을 먹을 수 가 없었다. 두 번째 상징물은 작은 손수건과 린코가 마지막에 선물한 털실로 짠 젖가슴이다. 나는 이 두 개가 질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중간대상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이는 자신을 보호해주지도 마음을 안정시켜주지도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꼬질꼬질한 작은 손수건을 꼭 쥐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아이가 외삼촌과 린코의 집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이의 손수건은 외삼촌의 집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린코의 따뜻한 사랑으로 성장해 이제 더 이상 그 옛날의 작은 손수건은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았다. 대신 그 아이는 따뜻한 젖가슴을 갖게 되었다. 아마 그 젖가슴으로 아이는 삶을 좀 더 잘 견디며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에게 온전한 젖가슴이란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며, 따뜻한 보살핌이고, 의사소통이고, 책임감이고, 건강함이고, 유대감일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는 외삼촌과 린코와 같이 살지 않고 엄마와 살기로 선택을 했을까? 하는 점이 의문이었다. 따뜻한 사랑을 주는 완벽한 곳인데 왜 차갑고 박탈을 주는 이기적인 엄마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을까? 물론 나쁜 대상이라 할지라도 진짜 엄마가 없는 것보다 나쁜 엄마라도 아이에게 있어야 함을 정신분석에서 배웠지만 마음이 무겁다. 이 찹찹한 심정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이러한 의문 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 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에 대해서 감히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고 판단할 수가 없었다. 무섭고,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화를 내거나 대들 수가 없었고 늘 조심하고 비위를 맞추고 또 혼을 내면 그냥 당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그런 엄마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엄마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특히 언니의 투병과정과 죽음 속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고 괴로웠다. 언니가 우리 곁을 떠나기 한두 달 전 계속 언니를 돌보던 형부도 지쳐 잠시 친정집에 있기를 바랬지만 엄마는 내게 짜증과 신경질을 내며 왜 엄마를 재촉하는지, 엄마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러는 거냐며, 또 가사도우미가 없는 주말에는 내가 와야 한다고 하시며 언니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하셨다. 또한 주말에 내가 언니의 식사 준비와 식이요법을 위한 야채스프 등을 만들 때에도 엄마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엄마라면 당연히 자식이 아프다는데 엄마에게 가겠다는데 어서 오라 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더구나 지금껏 언니가 투병하는 중에 직접적으로 돌보아준 일이 없었기에 엄마의 그러한 태도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도 처음부터 친정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았고, 2주정도 뒤에 언니의 상태는 악화되어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얼마 안 있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런데 그 이후 엄마의 태도는 세상 그리 사랑하는 딸을 잃은 사람 같았다. 언니의 제삿날과 생일을 정성스레 챙기고, 언니의 무덤앞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며 “00야~ 엄마는 너를 사랑했다~~”고 울부짖었고, 너무 그립고 슬퍼 울지도 엄마를 말하지도 못하는 조카들한테 엄마 무덤에도 와보지도 않는다며 형부에게 섭섭해 하고 닦달하고 애들이 모질다고 하였다. 나는 그런 엄마의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살아있을 때 잘 하지, 살아 있을 때에 엄마를 필요로 할 때에는 냉정하게 도망갔다가 이제와 사랑을 이야기하니 엄마의 이기적 태도, 자기에게만 매몰되어 있는 태도에 실망하는 것을 넘어서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내가 “엄마”라는 상에 대해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게 되었다. 그렇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넓은 품으로 감싸 안고 자식이 힘들 때 위로가 되고 힘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5-6세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 충분히 배울 수 있었고, 사랑받을 수 있었는데 그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셨다. 또 엄마는 반짝반짝 빛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농사일과 어르신들을 모시느라 바쁜 외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엄마는 그런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 아빠를 택했다. 아빠를 통해 시골에서 벗어나 서울로 갈 수 있었고 대학을 다닌 아빠로 인해 배움에 대한 욕망을 대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도 엄마가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이런 과정에서 엄마는 누군가와 인간적이고 따뜻한 정서적 관계를 맺는 걸 경험하고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누군가를 돌보는 것도 서툴고 또 돌봄을 받는 것도 서투르다. 우리가 엄마를 생각해 선물을 하면 엄마는 항상 짜증을 내며 “뭐 이런 걸 사왔냐! 네가 사온건 내 맘에 쏙 드는 게 하나도 없다!”하며 선물 사온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다. 관계라는 게 주고받는 것인데 엄마는 일방적이다. 누군가를 통제하거나 착취하려고만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죽어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과는 좋은 모습이고 또 엄마가 높으신 어른이라고 따르는 스님들이나 엄마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엄마 말이면 뭐든지 다 옳다고 하는) 저희 외숙모와는 좋은 모습으로 지내는 것 같다. 엄마는 양육과정 속에서도 또 결혼생활에서도 의존할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충분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서, 결국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줄 수도 없었던 거 같다. 우리 엄마는 그런 한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한계 속에서 엄마가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마음이 편할 때 엄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까지이다. 나도 내 이상으로서의 엄마가 아닌 진짜 나의 불완전한 엄마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엄마뿐만이 아니라 내 주위의 다른 사람 특히 가족들에 대해 실망과 두려움, 불안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그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모습을 갖길 바라는 기대 때문인 것 같다. 기말고사를 맞이한 아들에 대해서도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완벽한 중학생’의 모습을 기대하였지만 기대를 저버리는 아들에게 화가 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 혼자서 내적 투쟁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최근에 아빠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우리 집에 5-6일정도 머무르시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해서, 매일 새로운 국을 끓이고 고기가 아닌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반찬을 준비하고, 아빠가 거의 혼자 계시지 않도록 일이 끝나면 바로 퇴근, 아빠와 같이 산책, 아빠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또 아빠가 원하면 티비 시청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전혀 평소의 내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4일이 지나는 날 나는 심하게 체했고, 음식을 만들기 위해 가스레인지 앞에 서면 구토가 날 것 같았다. 물론 아빠도 편하지만은 않으셨다. 결국 난 소위 오버를 한 거다. 우리 집에 계신 동안 아빠를 완벽하게 모시겠다는, 아빠를 충분히 만족시키겠다는 나의 오만이 불러일으킨 결과라 생각한다. 아빠가 다시 아빠 집으로 가시자마자 내 체기는 사라지고 다시 편안히 가스레인지 앞에 설수 있었다. 


예전에 수업에서도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사람에 대해 이상적인 모습을 기대했다가 실망했던 에피소드 얘길 하셨지요. 그 이유를 분석해 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부모에게서 떠나는 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가족과 주변 이들에게 의존적인 모습이 강해요. 물론 의존의 모습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치(변장) 되는데 누군가에게 이상적인 기대를 하는 모습을 갖는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은 어떠한 자질이 있어야 하며,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어떠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사실 나의 기호에 맞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인생에서 일어나는 고민의 답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지요. 또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적입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나와는 잘 지낼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이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인생의 균형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좋은 사람도 부족한 사람이 있어야 빛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군가의 역할이나 행동, 기분이나 심리로 상처를 덜 받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적절함에 대한 두려움은 늘 수동적이게 만들죠. 나이에 맞지 않는 과도한 관심이나 늘 기분 좋다고 여기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거나하는 것이야 말로 정말 매우 이상적인 모습이에요.


<안경>

이 영화는 상담선생님을 통해 추천받아 봤던 작품이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줄탁동시’를 말씀하시면서 그 영화 속에서 팥을 삶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이번에도 그 장면이, 그리고 그 할머니의 표현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절대로 조급하면 안돼, 절대로” “그러면 반드시 기필코 언젠가는...” 조급함은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또 상담을 하면서 많이 갖게 되는 감정이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 그런 불안감에 팥을 뒤적이고 불을 켰다가 줄였다가 하는 것처럼 괜히 아이를 들쑤시고 혼내고 종종거렸다. 상담에서는 그 불안을 견디지 못해 초반에는 일찍 종결시켜버리는 경우도 많았었다. 그러나 내가 버티고 그 시간을 견디어준 아이는 어느새 변화된 자기의 새로운 세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내 아이가 중간고사 공부를 하기로 계획해 놓고는 운동을 갖다 와서는 그냥 자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 대해 걱정하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서 내가 싫어하는 아이 아빠와 닮은 점을 발견하고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까지 아이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아이 아빠에 대해서 화도 나고, 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속을 끓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저 모습이 저 아이의 미래, 결과, 끝이라고 단정 짓지 말자고 생각했다. 지금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방법을 알려주자,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게 도와주자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시 아이가 잠을 잘 수 있게 내버려 두었고 어느 정도 잠을 잔 뒤에는 깨워 계획한 것을 다 이루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획한 것을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니 조금이라도 네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편안히 자자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이도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계획한 것을 20여분 정도 한 뒤에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나도 편안할 수 있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결정이나 매순간 일어나는 크고 작은 중요한 결정은 아이는 스스로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에게 계속 배우고 훈련해 나가야 합니다. 매우 의존적인 사람만이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항시 다른 사람에게 내리게 해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겉으론 잘 따라서 동의하는 듯해 보이지만 수동적으로 방관하기를 선택하게 됩니다. 앞의 피드백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엄마가 의존적일 때 아이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고(나쁜 엄마이거나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아이를 보호하면서 제대로 반응을 못하게 되면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 갈등 속에 갇히게 됩니다. 부모와 아이는 서로 닮아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과잉보호의 모습이든 박탈의 모습이든 그 상호작용은 평생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8.영화 안경,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오닉스님)

1. 안경

영화 처음부터 안경에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배우 대부분들 안경을 쓰고 있다. 렌즈에 도수가 들어있지 않은 안경을 쓰고 있으니까 이건 무언가 메타포적인 설정이다라고 더 확신하게된다. 영화는 전반에 걸쳐 숨을 뚫어 두어 생각할 여지를 주고, 거꾸로 생각할 필요 없다는 말도 하고 있는 듯하다. 타에코 씨는 짐을 길에다 두고 오면서 자유와 사색으로 진입하며, 빙수를 맛보고, 안경을 바람에 날리게 되면서 수용과 확신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나 관심은 없다. 그냥 여기서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사색하며 위로받는다. 동화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특히 쉽게 다다를 수 없는오지라는 점에서, 이전의 시공간과 분리되어 사색하게 된다. 드디어 가만히 있음으로역설적으로 더 길게 갖게 된다. 뜨개질을 하며 공기를 함께 담는다. ““사색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니””라고 놀란다. ‘음, 이런 놀람이 더 놀람을 일으킬 사람들이 훨씬 많을텐데’라는 웃음. 그들 또한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지만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지만 동화되게 하는 힘이 있다. 어디에서라도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을 받게하는 것일 수 있겠고, 사쿠라 씨도 생명이 꿈틀대는 봄에 와서 자유의 힘을얻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지요””, ““뜨개질은 공기도 함께뜨는 거다””라는 대사가 특히 더 남는다(감독에게 뜨개질이란 무엇일까). 여행의 마감은 물리적 시간의 유한이기도하지만 상황의 따분함이기도 하겠다. 뜨개질의 공기처럼 비어있는 공의 의미를 품는 것이 삶의위로이자 동력이란생각이다. 나는 어떠한가? ““무엇이 이리 바쁜가요?””라는 말에 ““바쁜 척이요.””, ““그냥 다 그렇잖아요.””라는 둥의 말로 응수한다. 힐링이라는 단어의 강박성에 상처입기도 하지만 힐링, 치유, 기다림, 느림, 대면이라는 것이 어느순간, 특히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네가 어디서 무얼 하(였)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메리올리버의 기러기를 떠올리게하는 순간이다). 어깨가 무겁고 목이 뻗뻗해서 매주 주사를 맞는다. 나는 무엇을 길바닥에 버려야하는 걸까. 좀 무책임해진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채움보다는 비움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타이코씨의 가방에서 배운다. 


2.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나에게는 안경이라는 영화보다 이 영화가 더 친절하게 느껴졌다. 빈틈이 좀 없어서일 거 같고, 더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참고로, 나는 다른 분들보다 LGBT를 만날 기회가 좀더 있다. 환자 중에는 트렌스젠더도 실제로 있고, 그의 부모님도 만난다. 영화를 보면서 해결, 해소되지 못한 순간의 ““내면의 어린아이””가 생각난다. 토모의 할머니, 어머니 모두 아픔의 어린아이가 보인다.““나는 엄마이기전에 여자란 말이야. 숨이 막혔어””.린코의 털털하고 보듬어주고 수용하고 이해해주는 어머니 덕에 린코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고 돌보고 싶어한다. 헤세는 내면의 어린아이를 키워가는 중이다. 다행히 이제 토모는 내면의 어린아이를 보듬어줄 마키오와린코가 있다.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부모와 자식도 결국은 사람대 사람이야.””라고 말해준다. 같이 계단에 앉아서 셋이서 뜨개질을 한다. 이렇게 진심으로 엮으면서 가족이 된다. 어린아이를 가진 어른이 다른 사람에게 아픈 어린아이를 심어주는 것 같다. 나의 어린아이는? ““잘 해야만해, 끝까지 가야만해, 너는 싫으면 안되. 말 잘 듣지. 너는 떠날 수 없어.””라고 말하고 있다.수시로 ““내가 아닌 남이 되어 산다””는 것 같은 나의 문제를 생각한다. 경계를 갖추지 못한 내 자신. 나는 왜 어려서부터 감정을 표출하기보단 억누르는 길을 택했을까.


나의 어린아이를 만들게 되는 것은 언제어떻게일까?나는 부모님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조건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라는 상황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감정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좌절이 자리잡게 되었을까?내가 생각하는 어머니와 실제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격인가이다.나의 기억 속에 있는 정형화 되어있는 어머니는 희생과 사랑의 어머니인데……이건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와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어머니 또한 그의 어머니에게서 감정적인 위로를 받지 못하였을 것 같다. 어머니의 목소리로 본 할머니의 상은 여성성, 규율, 엄격으로 표현된다. . 어머니가 썼던 표현 중 하나 ““감히 나에게 도전””, ““배신””등이 기억이 난다. 대신 ““미안하다””, ““내 탓이오””의 말은 드물다(실수가 없어야 하기에).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의 관계, 그리고 남편에의 요구가 나에게 전이 된 부분에 대한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사업적 무능을 나에게 강조하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나에게 엄격히 훈육하고 강요했다. 나에게 혼전 순결을 강조, 강요했다. 억압, 통제의 목소리다. 빈곤의 두려움을 키워주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두려운 곳으로 가르쳐주었고 회피의 편리를 보여주었다.조건없는 사랑을 추구하게 한다. 사춘기에 부부간의 갈등시기에 어머니의 입이되고 어머니의 담이 되어야 했던것에서 다시 경계를 세우기 어렵게 하고,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겠다 싶다. 개체로써 떨어져 나와야 할““독립의 시기””에 더 의존하고 주체를 상실하게 되며휘둘리게 된다. 어머니가 나의 대학 입학 자체를 물론 기뻐했지만, 자신의 업적으로 인정받음으로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었다. 이렇게 부모, 어머니 욕구에 적응하면서 나의 목소리보다는 ‘~의  목소리’에가까왔고, 목소리에 기대고 싶고부흥해야만 했었나보다. 나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의 구분이 어렵고(지난 시간 지적했던 융합?), 타인의 불편이 나를 힘들게한다. 미루게 된다. 명령의 목소리는 실행과 성취만을 떠밀며 판단의 시야를 가려버리는 듯하다. 선뜻 나서기도 어렵다. 타인의 도움을 흔쾌히 받기도 어렵다. 투쟁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늘 작은 어른이었던 나는 어린이와 성인의 단계만이 내 삶의 기억에 남아있는 듯하다. 그 중간계의 시간이 없는 것이다. 사춘기의 욕구가 기억이 없다.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태도를 변화하는 것, 권리를 주장하는것, 거절하는 것,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두 영화를 통해 앞으로 진정한 유대와 사랑, 내면의 어린아이를 돌아보고 사색과 여유,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시간을 갈구한다. 결국은 아직은 손에 잡히지 않는 나의 어린아이를 더 찾아 대면하고 보듬어주어야지. 나의 옹벽을 무너뜨려 나가려고한다. 단단한 벽에손을 다치겠지만 벽을 넘어가 더 나다운 나로 다가가고싶다. 남은 삶에 주체성을 부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