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후기

부모교육 클래스위니캇강의를 마치고...

1. 내사와 피가학증(보라님)


꿈 - 한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할 것 같은 남자에게 끔찍하게 두들겨 맞고 있다. 이어 강간도 당하고 있다. 그들은 부부라는 데,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그냥 얼어붙어 꼼짝 할 수가 없다. 너무 무서워 떨지도, 소리도 지르지 못하겠다. 바라만 보고 있는 나는…  답답하게 순종적으로 맞는 여자의 비참함과 더러운 수치심을 유발하는 소름 끼치는 남자를 쳐 다만 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위의 꿈은 위니컷 수업 중 에셀의 사례를 듣고 난 후에 꾼 꿈이고, 그녀의 사례는 나를 형용 할 수 없는 원초적 불안과 무시무시한 분노를 일으키며 깊은 무의식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에셀은 가학적 학대를 받은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으며,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상담자를 찾아온 그녀는 상담 셋팅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수개월이 걸렸고, 처음에는 전혀 자기의 상태를 느끼지 못하는 반사회적구조를 지닌 내담자였다. 어릴 적 빌딩 하나를 태워버린 무시무시한 비밀을 안고 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아프리카 여행중 검문소에서 끔찍한 집단 성폭행을 당하였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마비된 상태였다.


엣셀처럼 무의식에 억압된 공격성은 박해불안을 만들어 내며, 본인 스스로 존재의 연속성을 끊어버려 현실 안에서 누구 와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한다. 엄마에게서 대면과 이해되는 경험 없이 쓸모 없는 느낌을 받는 아이는 박해를 만들어 내고 망상에 시달리며 내사와 투사 기제를 사용하여 평생 고통과 불안 속에 힘들게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세상과 단절된 비현실적 엄마에게 키워졌다. 나의 엄마는 내가 그녀의 아이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주지 않았고, 세상과 단절하게 하여 자신의 세상에서만 나를 살게 했다. 나는 엄마에게 버려지는 공포에 늘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추고 사는 분신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며, 나의 고통이 곧 그녀의 고통이어서 누가 주체인지, 혹은 무엇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는지 이유를 알 수도 없었고, 알려고 조차 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모든 인간 관계안에서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재연할 수 밖에 없었으며 발달하지 못했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엄마에게 마땅히 받았어야 했던 사랑을 아무에게나 기대하고, 좌절하는 굴레를 되풀이 해야만 했다. 엄마의 광증으로 인해 경계 없는 일차적 사고에만 머물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무섭고도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도 사소한 자극에 마구 휘둘리면서 이유를 모른 채로 생활에 지쳐만 갔고 가슴안에 분노만 가득했다. 하지만 거대한 풍선 같은 분노를 품은 나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 전혀 인지 할 수 없었고, 온통 부정적 기대만으로  나에겐 가벼운 일은 없었으며 주변은 심각하기만 했다. 전혀 내 존재와 관련 없는 사소한 관계에서도 흔들리고 삼켜지는 내사 기제의 고통으로  허전함, 만성우울, 무기력과 같은 병리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야했다.


간혹, 절실하게 건강한 사람을 찾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현실과 연결 할 수 없는 나의 병리적 초기 버려진 경험으로 늘 부정적이고 파괴적 결과로 끝이 났다. 나를 모르고, 나라는 존재로 살아 갈수 없는 나의 내사 기제는 상대방과 나의 존재를 구분 짓지 못해 상대방에 따라 휘둘리며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배고픔도, 화도, 행복도, 슬픔도 모두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지금 현실에서 최악의 피가학적 관계를 반복 해야하는 경우는 바로 남편과의 관계이다. 사실  나와 같이 부모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적당한 보살핌의 경험이 없는 내 남편은 분노 조절이 힘들다. 그를 바라보는 나는 같은 동병상련의 슬픔을 나누기 보다는남편을 엄마자리에 올려 놓고 나에게 끊임없이 학대하는 가학자로 만들어 버렸다.  엄마에게 순종할 수 밖에 없는 나였기에 피학자가 되어 분노를 품고서 아이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격노를 전가하고 전염시켰다.


이러한 부정적 자극은 에셀과 나의 꿈에서 비춰진 강간과 같은 나의 가학성이다. 이 피-가학성은 나의 정신과 신체를 마비 시켜  움직이고 사고할 수 없도록 정신기제에 자리 잡고 있다. 때로는 나의 헤비한 심각함이 다른 사람을 압도 시켜 함께 마비 하게 하기도 한다. 강간 장면을 재연 하듯 무섭고 수치스런 내 피가학성은 현실을 바르게보고 인정 할 수 없다.사실 에셀의 경우에, 상담자가 눈물과 함께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을 때 비로소 에셀은 눈물을 흘리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게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사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은 노력으로 오랫동안 부모교육 강의를 듣고, 상담을 받으며 대신, 진심어린 사과가 없어 놓여 놓지 못했던 현실을 조금씩 인정해가며 알아가는 과정을 겪고 있다. 처음 위니컷을 접했을 땐, 미러링부터 홀딩엄마..  중간대상, 동일시,  분리, 거짓자기와 참자기, 공격성, 죄책감,도덕성등등 주제 하나하나 접할 때마다 내가 받지 못한 초기 보살핌에 가슴 찢기는 슬픔으로 울부짖었었다. 몇 번을 반복하며 강의를 들은 끝에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분리된 주제가 아닌 모두 연결된 하나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무거운 나의 현실을 벗기는 연습을 해가며 가벼운 참현실을 인정하는 성숙된 그날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해본다.




2. 참자기, 거짓자기, 공격성의 통합(초록님)


나는 한두달전에 시작된 주제 “참자기와 거짓자기”, 그리고 “공격성의 통합”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참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 엄마의 심부름으로 약국에서 ‘까스명수’를 사러갔는데, 나는 약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약국 근처에서 “까스명수 주세요(고개숙인채 낮은 목소리로)” “아줌마~까스명수 주세요(한껏 밝은 목소리로)” “저기 까스명수 주세요(단조로운 톤으로)”하며 마치 배우가 대본속 대사 연습하듯이 가장 적합한, 약국아주머니가 뭐라고 하지 않을만한 말을 연습하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가듯 약국에 들어가 방금전 열심히 연습한 “까스명수 주세요”를 말했다. 그깟 “까스명수 주세요”가 뭐라고...그런 모습은 은행 심부름을 가서도, 물건을 사러 가서도 그랬다. 그게 뭐라고, 누가 뭐란다고...나는 그런 것조차도 두려웠다.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게 맞춘 나의 모습을 만들어갔던거 같다. 그런 모습이 바로 나의 거짓자기였던 것 같다.


또한 나는 나의 행동과 이야기에 나의 주관을 넣을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가, 나의 행동이 틀릴것 같고 비난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누가 내 의견을 물어보면, “글세...잘 모르겠어”가 주로 나왔다. 어쩌다가 얘기를 꺼내다가도 다른 사람이 표정이 어떤지, 반응이 어떤지를 살피며 금새 말을 끝내버렸다. ‘내 이야기가 지루한가봐..’, ‘내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거 같아’ 라고 지레짐작했다. 나는 나의 욕구가 부끄러웠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찮은 것이었는데 반해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의 모습은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나는 뜨뜻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외롭고 추웠다.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지만 내 스스로는 진정으로 나와 함께 한다고 생각되는 이가 많지 않다. 가장 친한 친구들도 그들도 나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두렵다. 이렇게 진짜 나의 욕구를 숨기고 다른 사람의 욕구에 맞추는 모습이 나의 거짓자기였던 거 같다.


나의 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셨다. 나는 어렸을 때 실수가 많았던것 같다. 엄마가 사준 브로치도 망가뜨리고(일부러 그런게 아닌데..), 금고 위에 올라가다가 말을 딛었던 손잡이가 부러졌고, 물통 손잡이도 냉장고를 닫다가 부셔뜨리고, 난간을 타고 내려오다가 엄마가 소중히 여기던 선인장 화분도 넘어뜨렸다. 아마 꽤나 나는 활동량이 많았나 보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엄마는 내게 “너는 항상 일을 저지른다며 물건이 남아나지 않는다”며 혼냈다. 때로는 내가 잘못한거에 비해서 굉장히 심하게 맞았던거 같다. 선인장을 넘어뜨려 내 발에 엄청나게 많은 가시가 박혔음에도 엄마는 넘어진 선인장만 아쉬워했고 그것만을 돌보았으며 일을 저지른 나는 일저지르는 아이라며 욕을 얻어먹고 혼자서 방에서 발에 박힌 선인장 가시를 뽑았다. 너무 많아 하나하나 뽑을 수 없는 것은 손톱깎이로 잘라버리거나 그냥 살 속에 밀어넣어 버렸다. 


나는 무서운 엄마에게 한번도 대항할 수 없었다. 엄마의 화내는 모습, 욕하는 모습, 때리는 모습은 내게는 너무나 무섭고 끔찍했으며 빨리 끝나버리길, 내가 없어지길 바랬다. 그냥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꿀꺽 삼켜내려 했었던 것 같다. 결국은 나는 엄마 말을 잘 따르는 아이, 엄마 아빠를 즐겁게 해주는 아이로 자랐던것 같다. 돌이켜보니 나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그냥 그대로 참 잘 받아들이며 누구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기 보다는 거의 대부분 수용하며, 문제 상황에서도 항상 나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즉 나는 “투사”보다는 “내사”를 주로 사용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것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따랐다. 내 real want는 철저히 무시한채. 그러다보니 나는 참자기보다는 거짓자기를 주로 내세워서 살았던 것 같다.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공격성이 부족한 것도(공격성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것도 참 많다) 내가 거짓자기를 사용하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real want를 수용받았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참자기를 부끄러워 하며 숨겨왔고, 거짓자기로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니 진정한 객관적인 세계를 보기보다는 항상 두려워하는 주관적인 세계로 타인과 교류하였고 그러다보니 나는 항상 겁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겁먹는 나의 모습을 보려 한다. 보다보니 참 많았다. 어쩌다보니 일거수 일투족이 그러한 것 같을 때도 있어 괴로웠다. 때로는 참자기를 표현하려(내 감정에 대해 상대에게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했고, 때로는 그냥 피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내사, 참자기, 거짓자기, 공격성에 잠겨있을 때 꾼 꿈이 다음과 같다.


박근혜 대통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데모를 한다. 집에 있었던 나도 데모에 참가하려 집 바깥으로 나간다. 그런데 내가 바깥으로 나갔더니 갑자기 박근혜쪽에서 최루탄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황색의 연기가 바닥에서 자욱하게 올라온다. 나는 저 연기를 마시면 안된다 싶어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집 마당까지 그리고 집안으로 까지 연기가 피어오른다. 나는 연기를 마시면 안된다 생각되어 천으로 코를 막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다행히 방안으로는 연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음) 방 안에는 나 외에 다른 여자가 있다. 그런데 방 바닥에 돈(5만원권? 10만원권? 하나)이 떨어져 있는데, 그 돈은 내것이다. 


나는 지갑 안에 돈이 더 있지만 지갑은 다른 곳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돈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 여자가 방바닥의 돈을 가져가려 한다. 나는 얼른 내 돈이라며 돈을 집어든다. 그리고는 이 돈을 만원짜리로 바꿔서 그 여자에게 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나와 그 여자를 잡으러 누군가가 들어왔다. 우리는 다른 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전석호(예전‘미생’에서 강소라를 굉장히 괴롭히던 대리 역할을 한 배우)가 호시탐탐 내 돈을 노리는 것이다. 우리가 잡혀가면 그 돈을 가로챌 생각인 것이다. 나는 돈을 빼앗기기 싫어 나를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석호에게 먹을것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며 전석호를 데리고 방을 나와서 마당에 갔다. 그리고는 양파와 여러 야채로 절임을 해둔 통에서 양파만을 골라서 햄버거 패티위에 올려 놓는다.


내가 연상되는 박근혜 대통령은 최고로 거짓된 사람, 가식적인 사람, 제대로 된 자아를 갖지 못한채 과거에 자신이 누렸던 지위나 타인이 만들어 놓은 우상같은 허상(虛像)으로 사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아마 나의 거짓된 모습이 박근혜라는 인물로 나타났고, 나는 이제 그렇게 거짓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변하려고 하면서 박근혜에 반기를 들고 데모하려 나섰던거 같다. 그러나 아직 나는 미숙하기 때문에, 또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왔던 거짓자기가 굉장히 강력하고, 또 참자기가 나올 때 강한 박해불안, 유기불안과 같은 강력한 불안이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불안이 최루탄의 연기로 상징된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 집으로 숨어들기도 했던 것 같다. 집안의 다른 한 여인은 뭔가 초라하고 힘이 없어 보였는데, 그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여인에게 즉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나에게 돈을 주어 힘을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시 나의 거짓자기를 만들어낸 강한 불안들은 나를 거짓된 모습으로 살도록 나를 데려가려 했고, 거기에 전석호라는 또 다른 나의 모습(전석호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것은 인기에 영합해서 시류의 흐름에 쫒아가기 보다는 자기만의 연기를 하려는, 남들은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자기 것을 하는 배우, 미생에서는 굉장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임)인데 그런 모습(공격성을 사용하고, 내 고집대로 하는 것)에 나를 뺏기지는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대신에 나는 그런 모습들을 돌봐줌으로써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려는 것 같다. 결국 나는 거짓자기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강력한 불안이 침습해 옴을 느끼고 철수했다가 그래도 이런 불안속에서 초라하고 연약한 나를 세우려고 하며, 공격적 태도도 수용하려고 하는 것 같다. 




3. 수치심(노랑님)


꿈 - 막내 동생이 심리치료 다니는 병원이다. 진료를 담당하고 계시는 주치의 선생님과 막내 동생, 엄마와 내가 진료실에 함께 있다. 선생님께서 동생에게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보라고 한다. 동생이 표현을 못 하고 있다. 내가 스스럼없이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한다. 얘기가 술술 나온다. 말 하면서 ‘내가 말을 왜 이렇게 잘 하지?’ 생각도 했다. 쾌감도 느껴진다. 얘기하고 있는 중간에 나도 모르게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엄마와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너무나 섬뜩했다. 엄마의 얼굴이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이 아니었다. 무표정하고 핏기가 하나도 없고 나무 목석같은 너무나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섬뜩하고 무서운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다.    


mirroring의 실패로 얻게 되는 수치심에 대한 수업이 이 꿈을 꾸게 했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엄마를 경험 했는지 알려주기도 하고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려주고 있는 고마운 꿈이기도 하지만 나의 아픈 역사이기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는 꿈이다. 꿈에서 엄마에 대한 표현을 하라고 했을 때 말을 몇 단어 빈약하게 꺼내 놓고는 더 이상 표현 하지 못하는 동생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표정도 없고 핏기도 없고(생기를 느낄 수 없는) 무서운 얼굴 모습을 한 엄마의 모습이 곧 ‘나’ 이기도 함을 알려주는 꿈이다.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이 불안하고 혼란한 병든 엄마는 잘못되거나 무반응으로 나의 존재에 어떤 생기도 불어 넣어 줄 수 없으셨던 분이였다. 존재에 대한 수치감으로 나는 많은 인격적 결함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인격적 결함을 내 아이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물려주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짜증과 분노, 증오, 아버지에 대한 가득한 원망,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는 엄마에게서 내가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나의 어떤 것도 받아 줄 수 없었던 엄마의 모습처럼 나도 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고 아이가 무엇인가를 함께 하자고 하거나 요구를 하면 짜증이 올라오고 그렇게 귀찮을 수 없다. 나는 아이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가 느끼는 것을 함께 나눈다는 게 참 어렵다. ‘저 영혼 없는 대답 좀 보소’ , ‘완전 포커 페이스네’ 우리 아이가 나에게 잘 하는 표현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사진을 찍는 것도 피한다.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모습이 어떻게 봐도 예쁘지 않고 흉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 얼굴을 어쩌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얼굴인데도 참 낯설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손을 어떻게 두어야할지 모르겠고 몸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지만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는 성악을  전공 했는데 학교 다닐 때 내 목소리가 너무나 창피하고 보잘 것 없이 느껴져서 소리를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소리를 내 보고 실수도 하고 소리에 대한 고민을 사람들과 나누며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나는 사람들이 내 소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듣고 싶지 않았고( 나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할까봐),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도 너무 두려워서 견딜 수 가 없었다.  결국 나는 4년 동안  아무 것도 배울 수도 없었고 노래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긴 했지만 꿈꾸던 것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도움이 되어주려고 하는 말도 모욕 받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수정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 결국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던 모습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존재 전부가 다 온통 창피하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이 느낌의 근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됐는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상담과 수업을 듣게 된 것도 어느덧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 위니캇 수업 때 잠깐 들었던 생각이긴 하지만 ‘너무 심각해서 구제불능 일 것 같았는데 그래도 내가 많은 것들이 회복되어 가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꿈에서처럼 선생님께서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해보라고 했을 때 거침없이 줄줄 말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마비되어 눈도 감기고 귀도 막히고 입도 닫혀서 아무것도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해서 몇 단어도 우물거리며 표현하지 못했던 막내 동생의 모습이 곧 나였으니까 말이다.  


상담선생님과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 내 존재에 대해 진심으로 존중받고 이해받는 경험도 있었지만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내 불편한 것들을 견딜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면서 수치심으로 인해 생겼던 깊은 상처들을 극복해가며 살 수 있게 된 것 같다.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라고 아들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정신 분석 공부를 해보니 그 말뜻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그 어려운 일을 내 삶속에서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가치 있는 의미가 매겨지는 것 같아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자신의 발달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도 마음에 새겨보며 앞으로 더 성장하게 될 ‘나’를 기대해본다.  




4. 나는 어떤 사람?(빨강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을 느끼고 싶지 않아 얼른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위장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차갑고, 두렵고, 무서운 경험을 했던 사람으로, 너무 끔찍해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방어를 하며 덜덜 떨며 세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고소공포증이 있어 높은데 올라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높은데 올라가고 올라가서 느끼게 되는 만족감과 희열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그 경험은 엄마와 떨어졌던, 엄마를 놓쳤던 생 후 일 년의 아기가 느꼈던 세상의 경험인거지요. 


엄마를 놓쳤던 그 시기의 경험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불안함으로 늘 작동되어 세상이 숨 막히게 두렵고 힘들게 살도록 했습니다. 위니컷을 통해 엄마를 놓친 아이는 그렇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나를 보니 늘 나침판 바늘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바심을 내며 불안으로 떨던 나는  나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마침내 불안의 바늘이 천천히 도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고, 마침내 그 바늘을 멈추게도 할 수 있고, 조절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늘 끊긴 것 같은 기억의 조각을 들고 답답하기도, 망연자실하기도 한 기억들, 현재에도 끊기게 만들고,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당혹감, 세상에 대한분노들을 위니컷을 만나고 지나오면서 이제 연결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만납니다. 이제 세상이 차갑지 않습니다. 이제 따듯하게 하는 방법을 알게 있게 되었고, 왜 내게 세상은 차갑게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높은 산을 올라가 바위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처음에는 두 다리가 덜덜 떨려 죽을 거 같은 두려움에 압도되었지만, 그래도 버텨봅니다. 이제는 높은 곳을 올라가야지만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세상이 살만해졌고, 자유로워졌습니다. 야~호~  

  



5. 피-가학증(주황님)


나름 진지하게 수업시간에 집중하고자 하였어도, 그 진지함과 주의기울임과는 별개인지, 수업이 마치고 나면 그 부하물이 쉽사리 탁탁 정리가 되지 않아서, 수업 이후에 하루 이틀, 때론 그 다음 강의 때까지, 땅굴을 파기가 일쑤였습니다. 아마도 한 주 한 주 너무나 깊고도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주제들이며 내용들이라 곱씹어 소화시켜야 하는 것들이었기에, 그러한 듯싶습니다. 제 안에서 이리저리 중구난방 돌아다니는 이런저런 연상들이 오버랩이 되어, 집중도 해야했고, 때로는 애도도 해야 했고, 또한 어설프게 설핏 알고 있는 제 무지함을 피곤하다는 바쁘다는 이유-핑계로 내버린 것도 있어서 객관적으로 시간을 두고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보고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할 내용도 많은 듯합니다. 이렇게 저는 아직도 땅굴을 파고 있는 상황임에도, 위니캇의 대상관계 관점에서 제가 최근 한 두어 달 사이로 꾼 꿈-비슷한 점이 겹쳐지는 2번의 꿈을 가지고, 수업시간에 공부한 내용과 연결시켜 보고자 합니다(참고로, 저 같은 경우는 위니캇 수업에 중후반부터 참여하게 되어, 중간대상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요 근래, 한 두어 달 사이로 외로움, 고립, 망설임, 두려움(바깥 세상에 대한) 등의 부하물이 경험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고립과 두려움은 무엇으로 인한 것인가?를 몇 일간 곰곰이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하다보니 교육분석 시간에 자주 이야기한 것들의 훈습인가도 싶고, 현재 저에게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된 마음인가도 싶고 그렇습니다(실은 아직도, 진행중인 듯 합니다. 하지만 과제의 제출 기한이 임박하여 일단은 어설프지만... 몇 자 적어 내려가려 합니다).


  2번의 꿈 모두에서 나타난 공통의 장소는 제가 현재 독립하여 살고 있는 집입니다, 집안에서, 저 혼자 있는-창문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는 있으나 집안에서 해야할 것들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서 심심해하는, 외로움, 고립이라는 느낌이 연상되는 꿈이라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꿈에서 깨고 난 직후의 제 기분은 썩 달갑지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처음으로 독립하였을 때, 자유롭고 행복함의 느낌이 컸습니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자유로움과 행복보다는 외로움과 불안, 두려움 등이 잠잠히 맴도는 그런 느낌이 연상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의존하였던 내적대상(분석가)의 상실로, 현재 혼자서 훈습을 조심스러이 하고 있고, 엎치락 뒷치락거리고 있고,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을 물리치고자 하면서 해쳐나가고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제가 훈습하고자, 이렇게 혼자서 전전긍긍,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것일까? 하고 나름 오랜 시간 고민하고서야.... 공격성과 가학-피학에 대한 주제가 제 내면의 미해결된 갈등인건가? 하고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적어보면, 꿈속에서 저는, 사람들과 즐겁게 점심을 먹고, 먼저 일찍 일하는 곳에 갑니다. 일터에 왔는데, 없었던 큼지막한 짐들, 불필요한 짐들이 사무실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습니다. 치워야만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밥을 먹으러 갈 때만해도 괜찮았기에, ‘아니 이게 왠일인가?’ 싶어 합니다. 꿈속에서 저는 먼저 왔고, 먼저 보았으니 어서 치우자. 어서 치우자 하며 부지런히 치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소가 바뀌면서 저의 집,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제 집으로 장소가 변경되어졌습니다. 저는 창문을 통해서 바깥을 보는 장면에 놓여있습니다.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지나다닙니다. 시끌벅적 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창문을 통해서만 바깥은 봅니다. 바깥은 나가고 싶어하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바깥을 많이 응시함이 느껴지는 꿈을 꾸다가 깨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은, 저 혼자 집에서 지내면서 해야할 것들을 하고 쉬고 놀려는 모습이었습니다. 친구들이나 사람들과 어울리고, 나가려하기 보다는(창가를 쳐다보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혼자서 집에서 해야 할 것들에 집중하고 쉬고 집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꿈에서도 그렇고 깨어난 후에도 그렇고 경험되는 느낌은 제가 긴장을 하고 있고, 두려움, 무거운 마음, 외로움 등이 연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원 시절에(10여년이 조금 넘은), 믿고 따르던 스승님으로부터 마음에 크나큰 상처가 나면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 특히, 힘;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포를 경험하고, 그것이 시초가 되어 내담자, 환자가 되어 교육분석을 통하여 정신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전공이 전공이기도 했지만, 전공을 살리고자, 그것이 이유-목적이 되어서 교육분석을 받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내담자가 되어보면서 많은 내적인 갈등과 분화되지 못한 면들을 살펴보게도 되었고, 부적응적인 면에서 적응하고자 노력하려는 과정, 그리고 심리적 재탄생 작업을 하는 과정(훈습을 거듭하면서)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갑작스럽게, 분석 선생님과의 갑작스런 이별과 상실로(결국은 별세하심으로) 3년 반이라는 제 분석 작업은 마침표가 찍어졌지만, 그 후에, 저는 무척 슬프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분석 선생님의 별세 이후, 혼자 힘으로 엎치락뒤치락 훈습하며 지금껏 지내 온 듯싶습니다. 그런데, 제 이 2번의 꿈에서 제 내적갈등 중,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로 여겨지는 것은,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바로, 가학-피학, 그리고 공격성의 문제가 아직 저에게는 숙제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교수님(심리학 및 심리치료 관련한 교수님이 아닙니다)과 제자와의 관계에서 가학-피학의 관계로 경험해보았고, 그 관계가 제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연결되어져서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제가 거절을 잘 못하고, 공격에 대하여 서툴고 두려워하고 불편해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제 발달과정에서의 공격성을 일관성 있게 담아주지 않아서, 거절당하고, 보복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에는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는 제 마음에서 요동치고 느껴지는 불편함, 불쾌함을 나도 타인도 안전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랐기에(예: 이러지 마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무례하시군요 라는...) 그리고 참는 것이 미덕인줄만 알고 자라왔기에, 내면에서 경험되는 불쾌함, 속상함, 분노감, 슬픔 등을 속으로 삭히고 혼자 처리하는데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속에서 발생되는 갈등을 저는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방어기제를 주로 사용한 듯싶습니다. 


적다보니 샛길로 빠지는 감이 없지 않아있습니다만... 근래에, 저에게 중요한 인간관계에 놓인 지인과의 관계에서 제 마음의 불편함을 안전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괴로워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 불편함을 표현하면 공격한 것처럼 느껴져서 저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파괴될까봐, 친밀감이 깨질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많은 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지인의 품성이 안정적인 것을 많은 경험을 통하여 신뢰하고 있음에도 행여나 제가 불편했던 것들을 표현하면, 그것이 공격으로 전달될까봐 두렵고, 지인으로부터 역공격, 내지는 보복(대학원 때 어떤 교수님은 자신이 주관하는 스터디 모임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거나 자리를 채워 주지 않으면 응징, 불이익을 주는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을 경험할까봐 저는 혼자서 있기를 안전해하면서도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고, 해야할 것들은 묵묵히 하고는 있으나 심심하고 외로워하고 있음이, 제 꿈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연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관계의 호전을 바라면서도(꿈에서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것인지 저는 창 밖을 통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학-피학의 정도가 끔직하게도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하였던 석사 시절의 경험 때문에(두려움 이상의 공포스러워서), 그로인해 고립감,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두 차례의 비슷한 꿈으로 나타난 것은 제 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고, 이번 수업 시간에 공부하며 계속 땅굴을 파고 있는 개념? 내용으로는 특히 공격성과 가학-피학의 관계인데, 이에 대하여 아직 소화가 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과제를 잘 적어보자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제 마음이 교통정리가 덜 된 상태라, 두서없게 적어보게 되었습니다.




6. 더는 누군가의 딸로만 살고 싶지 않다(회색님). 


나는 위니캇 수업을 몇 번이나 반복해 듣는 동안 “내사”부분에서는 늘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고 어떤 무의식도 떠오르지 않는 대신 늘 관계에 있어서 “투사”의 예들만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사”를 쓰지 않는 사람인 줄 착각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며칠 전부터 “내사”가 내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내가 “내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지가 별안간 마구잡이로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 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무기력해지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며, 요 며칠 나는 누군가 내게 감정적 동의라도 조금이나마 구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쌀쌀맞게 “No"를 대답하는 미성숙으로 아주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예전에 엄마와의 융합을 나타내는 그 꿈이 다시 또렷이 기억이 났으며 그 꿈 역시 넓은 의미의 “내사”였음을 깨닫는다.  


1. 꿈. 내가 결혼하여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신혼집에서 밥을 하려고 수납장을 여는 순간 내가 산 예쁜 접시, 컵, 냄비는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친정에서 엄마가 쓰는 그릇들이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를 열어봐도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순간 너무 무서웠지만 나는 꿈에서조차 그 그릇을 버리거나 엄마에게 줘버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불쾌하고 화가 났으나 그 그릇으로 밥을 했다. 지금 의식에서 생각해보면 저런 이상한 엄마의 짓에 거부 없이 밥을 하는 내가 바보 같아 보이지만 나는 여전히 무의식에서 아직도 저런 상태이다. 나는 그렇게 길러졌다.


나는 내가 초자아가 강해서 늘 지나치게 엄격한 초자아 때문에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고지식하며 도덕적인 잣대로 결정을 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여 한 때 나의 이상형은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게 “내사”의 한 형태였다. 


우리 아빠는 술을 드시면 내가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우리 삼남매를 불러 앉혀 놓고는 늘 도덕적인 얘기, 책에 나오는 아주 지당히 맞는 말만 구구 절절이 늘어놓으며 그렇게 살라고 하신 적이 많다. 그 때 가정교육이란 이름으로 일장 연설 후 꼭 끝에 붙는 얘기는 “나는 낳았다고 다 내 자식이 아니다. 나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 내 기대에 어긋나는 자식은 자식취급도 하지 않을 거고 집에서 쫓아낼 것이다. 내 자식 될 자격이 없어”였고 나는 엄마보다 덜 무섭고 더 허용적이었으며 더 이성적이고 엄마보다 힘이 세다고 여긴 아빠의 말에 “아빠  말이 맞아요, 자식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좋은 얘기 해주셔서 감사해요”같은 아주 모범적인 대답으로 아빠의 비위를 맞추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늘 집에서는 동생들을 괴롭히며 엄마 아빠에게 받은 분노를 고스란히 다 동생들에게 쏟는 나쁜 언니며 누나였지만 밖에서는 늘 모범생이었다. 


   “너는 큰 딸이 되어서 조신하지 못하게 그게 뭐니? 언니가 됐으면 모범이 되어라. 어디에 쓸려고 저리 칠칠맞을까? 너 그러고 웃고 다니면 남들이 너 우습게 봐. 장난이나 치고 유치하게. 난 너 그렇게 안길렀는데 어디서 저런게 태어나서. 너 왼손잡이 그거 못 고치면 남들이 너 병신인 줄 알아” 나는 늘 자라면서 엄마에게 칭찬보다 욕먹는 게 익숙했다. 그래서 칭찬을 하면 “뭐를 또 시킬려구...”란 생각에 어느 순간부터는 칭찬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무섭고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결정적 상황에서는 늘 엄마의 착한 딸로서 인정받고 싶어함을 알았다. 한 달 전에도 엄마가 “내가 아빠랑 계모임에서 놀러가는데 회비로 가자고 하더니 다들 자식들이 돈을 대준다고 해서 회비를 안 쓴단다. 그러니 다른 자식들도 다 돈을 대준다는데 니가 큰 딸이고 네가 대주면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시겠니? 아빠한테 뭐라고 말할까? 니가 대준다고 해? 말아?” 이런 전화를 엄마한테 받고 너무나 화가 나서 머리로는 “No"라고 말해야지 하고 생각했으나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에 아주 친절하고 싹싹한 목소리로 “얼마 내면 되는데? 내가 효도 관광 한 번 시켜줄게”라는 대답이 나도 모르게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돈을 부치면서 욕을 해댔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나는 어릴 적부터 인정받지 못했다고 여겼던 인정을 부모에게 늘 받기를 바라나 결국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언젠가는 내게 고맙다 할려나? 안해도 그만이구. 자식이 꼭 인정받을려구 잘해드리나”하는 내 멋대로의 마무리로 늘 같은 상황을 재현한다.      


결혼을 해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나랑 싸우다가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분화되지 못한 분노를 내게 투사하여 쏟아놓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처음에는 객관적으로 사태를 보려하고 “이건 내 것이 아니고 남편의 몫이지, 더는 동요하지도 말자”라고 경계를 세우는 듯하다가 결국에는 “남편이 내게 화를 내고 내 탓이라고 하는 이유가 내게 있겠지. 내가 자극을 했을까? 그래.. 내가 투사적 동일시로 저 사람을 저렇게 화나게 만들었네. 아주 틀린 얘기가 아니네. 나는 왜 자극을 할까? 약한 사람인데 그래서 분노의 역치가 낮은 사람인데 내가 현명하지 못했네” 하고 서둘러 결론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모든 고통을 받으면서도 정당하지 못한 분노에 대해 무서워서 표현하지 못하고 내가 잘못인 사람마냥 나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고 억지로라도 문제점을 찾아내어 내 것이 아닌 죄책감을 마치 내 것인 것 마냥 갖고 살게 되는 것이었다. 지나친 죄책감에 늘 나는 원가족과의 관계에서 죄인같은 느낌인적이 많았는데 이것이 나의 미성숙한 “내사”에서 비롯된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니... 5년을 교육을 들어도 열리지 않았던 내 무의식이 이제야 열리며 내가 더 객관적으로 보이다니... 그런데 즐겁지 않고 기쁘지 않고 혼란스러우며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니...


이런 혼란을 뒤로 하고, 나는 늘 성장하기를 바라나, 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는 것에 익숙한 내 안의 어린 내게 말해본다.  “너는 왼손잡이여도, 길거리에서 침을 뱉고 신호를 어겨도, 싫은 사람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거짓말을 해도, 부모에게 효녀 딸이 아니어도, 엄마의 지나친 요구에 ”No"라고 말해도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무슨 짓을 해서가 아니라 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이미 부여받아 태어났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야. 따라서 더는 이렇게 미성숙한 방법으로 인정받기 위해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는 누구의 딸이 아닌 관계에서 자유로운 “나”로 살길 바라며 너를 위해 늘 기도하마. 사랑해”   



   

7. 거짓자기(검정님)


꿈 - <머릿니가 머리 가득하다. 머리카락에서 머릿니가 뚝뚝 떨어지고 온통 서캐로 꽉 차서 흰머리 같다. 가렵고 창피해서 머리를 감고 참빗질을 해도 없어지질 않아 속상해 우는데 누군가 약을 머리에 바르고 감으면 바로 없어진다면서 약을 건네주고 간다. 약을 바르고 머리를 감으니 서캐와 머릿니가 떨어져 나간다. 머릿니를 쾌감을 느끼면서 한 마리씩 죽이며 기분이 좋아 박수를 친다.>


이 꿈은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꿈이다. 머릿니는 지금껏 제대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참담하고 힘에 겨운 나의 원초적인 불안들이다. 그동안 딸이 정신증을 앓고 있었는데도 불안과 공포, 수치심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부모님에게도 말을 못하고 숨기고 지내왔다. 사춘기부터 도와 달라 보내는 아이의 신호를 듣지 못하고 방치해서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인격이 손상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병을 안 다음에도 병의 원인이나 치료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일 년을 치료에 실패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구소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눈만 뜨면 하루가 버거워 딸과 함께 죽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꿈에서 약을 주고 간 사람은 상담 선생님이신 것 같다. 내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지원받지 못한 것을 그동안 부모교육과 상담을 통해 이해받으면서 불안. 수치심이 조금씩 해소되면서 비로소 딸의 문제를 현실에서 제대로 알게 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었다. 아이를 강제로 입원시키고 일 년동안 약물치료와 낮 병원에 다니게 하면서 치료를 실패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위해 그 어떤 것도 중단하거나 변경시키지 않고 노력해나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는 많은 사람들이 십년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에 또는 병의 의미를 잘 몰라서 청소년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자녀수발에 지친 부모들이 죽고 싶다는 희망 없는 아우성에 함께 울기도 했었다. 


그들처럼 아이의 병이 나의 헐벗고 결핍된 모습을 드러나게 하고, 나쁜 엄마라고 판단하는 것 같아 아이의 마음을 외면해 보았기에 그들의 아픔이 너무나 크게 이해되었다. 그들처럼 나도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안했었다. 헌데 지금 나는 그들과 조금 다르다. 개인 상담과 교육을 통해 아이의 병이나 증상 그리고 원인을 이해해가니 병원에서도 나는 제일 안정된 지원을 해주는 부모의 모습으로 비춰져 인정을 받고 있다. 내 자신을 이해해가면서 조금씩 발달해가니 딸도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나에게 힘들고, 슬프고, 아프고, 흉한모습들이 수습이 되면서 묘한 긍정적인 힘이 생기고, 딸을 바라볼 때 괴물처럼 느껴져 혐오스럽고, 무섭고, 한 없이 가여운 모습보단 보통의 엄마와 딸처럼 현실에서 따뜻한 애정을 주고받는 사이가 시작되었다. 


거짓자기에 대해 강의를 듣는 순간부터 난 얼음이 되었다. 평생 나를 표현 못하고 ‘왜 나 혼자 이 힘든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나’ 피해의식에 젖어 살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나를 괴롭히는 원수로 느꼈기 때문이다. 간혹 내 주장을 내세우려면 그들의(친구. 식구. 직장동료. 시댁식구들)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그들의 얼굴표정과 행동이 변하면 난 얼른 말을 바꿔 그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거짓자기로 살아왔다. 난 시골에서 2남 3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특히 위로 3살 많은 언니는 나의 엄마였다. 우리 엄마는 돈과 일밖에 모르셔서 이른 아침에 밥 해놓고 일하러 나가시면 해가 저물어야만 들어오셨다. 그동안의 집안일과 동생돌보는 일은 언니의 일이었다. 난 항상 언니가 무섭지만 모든 걸 의지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려면 언니 기분이 좋아야만 허락 되었다. 언니가 집안일과 동생들 돌보는 일이 버거워 화가 나면 난 언니의 수족이 되어 도와야만 했다. 50대 중반을 넘은 최근까지도 시댁의 대소사. 자녀문제. 친구관계. 직장일. 신앙적인 문제 하물며 부부생활까지도 언니 의견에 맞추어 살아왔다. 언니의 허락이 떨어져야 만 살림살이도 사고, 옷도 언니취향에 맞추어 사다보니 늘 나이답지 않게 노숙하게 살아온 것 같다. 


사실 언니와 나는 똑같이 엄마에게  받은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언니도 나를 거울처럼, 쌍둥이처럼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겠지. 엄마 역시 위로부터 받은 경험이 없어 힘이 없고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주질 못했다. 엄마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안기고, 존중받고, 격려 받고, 힘들 때 위로도 받고 싶었지만 반대로 난 언니를 비롯해 친정, 시부모님, 동생들, 친구들에게 퍼주면서 살아왔다. 헌데 퍼주고 나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난 늘 억울하고 화가 치미는데 표현을 못하니 항상 불안하고 무기력해서 비참했다. 몸을 노예처럼 혹사시키며 돈만 악착같이 벌었다. 하지만 우아하게 풍요롭게 즐겁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피해의식으로 또 누군가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만 했다. 


거짓자기로 살아온 이 과제들을 언제 하나씩 풀어갈까 염려가 크지만 지금은 너무 재밌고 감사하다. 연구소에서 수업을 일 년 들으면서 5년 이상 수업을 들으며 열심히 성찰하고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이롭고 부럽다. 그들처럼 나도 나의 상처를 보듬어 저렇게 떳떳하고 똑똑하고 힘 있게 잘 지내고 싶다. 수치스럽고 아픈 상처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먼저 용기를 내어준 그들이 멋지고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8. 베파요소(자주색님).


꿈 -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주위 학생들은 21살인데 나는 이미 졸업한 26세다. 학생들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이미 다른 자격증 시헙에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여기서 왜 다시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사시패스를 열망하는 것도 아니다. 주위 학생들은  졸업(혹은 시험패스)을 해도 나는 계속 공부해야만 한다. 내가 이미 다른 시험에 패스했음을 알리고, 합격후 일할수 있는곳에서 일할수도 있는데 나는 그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답답한 상황에 절망한다.

 

위니캇 수업을 여러번 들었다. 처음에는 이런 이론도 있구나 하며 머리로 이해했고, 다음에는 주위 상황을 대입해하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계속 될수록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절망하게 된다. 꿈에서와 같이 주변에서 강의를 듣는 사람은 열망과 목표를 갖고 착실하게 생활하는것과 달리 나는 이미 여러번 타성적으로 들었으나 성찰없이 생활하고 있다는 생각에 초조하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습이 부끄럽다. 꿈에서 나는 이미 시험에 합격해서 다른 길을 갈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며 마치 남의 인생을 구경하듯 내 자신을 본다. 꿈에서 나는 학교 건물을 익숙하게 오르내리며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과 인사도 한다. 선생님도 나에게 반가움을 표시하지만 나는 이미 졸업해서 이곳을 나가야 함에도 계속 헤매고 있다.


나의 수동성과 자기애는 무척이나 심하다. 내 자신의 생각, 혹은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을 벽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외부에 사람이 있고 그들과 관계하며 생동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나의 배움을 가로막고 주위 사람을 지치고 무력하게 만들곤 한다. 꿈에서의 상황도 그 누구도 강제한게 아니라 내 스스로 갇혀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남 탓인냥 손 놓고 방관하고 있다. 나의 평소 모습이다. 요즘 그냥 내가 이런 사람인가 하는 마음에 지치곤 하는데 꿈에서 지속적으로 현재 나의 모습을 보여주며 성찰하라고 촉구하는거 같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마지막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베파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