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후기

하인즈 코헛 클래스하인즈 코헛 후기

1. 뿌리 박혀버린 나의 깊은 외로움                    -보라님.


나는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홀로 앉아 있는 깊은 밤이 무섭다. 갑자기 뼈속까지 스며드는 공포로부터 사지가 마비되는 경험도 하였고, 핸드폰의 주소록을 뒤지며 나를 보호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기도 하였다. 마침내는 아무도 없는 절망감에 어쩔 줄 모르고  불안으로 무기력한 나의 육신을 이불 속에 꼭꼭 숨겨버릴 수 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나는 한밤중 불빛 반짝이는 거릴 다니길 좋아했고, 클럽 안에 붐비는 화려함을 좋아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흔히 영화에서 보듯 나의 불안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결혼 후 나는  한밤중 밀려드는 원인 모를 공포, 불안, 외로움에 시달리며 늦게 귀가하는 남편과 무지 싸워야만 했다. 마치 그날이 우리가 사는 마지막 밤 인양...


코헛 강의를 듣는 매주 월요일은 나와의 전쟁을 치르듯 매 주제들에 압도당하고, 끊임없이 싸워야했다. 인정하기까지 힘겨웠던... 내가 지니고 고통 받아야 했던 원인 모를 '나쁜 기운'에 대해 알아내고 말았다. 그건 보호받고 사랑받아야할 시기에 무반응적 엄마로부터 박탈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그것은-나의 박탈은- 아예 내 정신적 구조를 깨버렸고 그결과 버림받은 상처로부터 오는 극단적 공포인 원초적 외로움이었다. 


나의 엄마는 '모순' 그 자체였으며, 분열 속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힘없는 여자였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땐 늘 엄마는 누워있거나 링거를 맞고 있었고, 남들이 평상시에 하는 보통의 일들을 너무 고생스럽게, 마치 혼자만이 하는 양 하였다. 내가 아플 적 병원에 조차 가기 힘들었던 엄마... 도대체 엄마는 어떤 박탈을 경험하였기에 그런 고통으로 일생을 살아야했을까... 나 역시 고스란히 물려받아 내 아이들이 아플 땐 당황하여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이럴까 저럴까하며 날 밤을 새기 일 수 였다(열이 오르면 응급실에 갈까 말까).


내가 태어난 직 후 엄만 세상이 힘들어 날 데리고 연탄불에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나의 웃음에 포기하고 말았다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나를 죽다 살아난 행운아 취급한다. 하지만... 난 과연 정말 새 삶을 얻은 행운아일까.......? 힘든 강의와 나의 성찰이라는 긴 여정 끝에 알게 된 답은 역시 '아니다' 이다. 한참 사랑받고 보호받을 시기에 세상을 등질 수도 있었던 '버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린 아기였던 난 모르지 않았을 것이고  막연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표현 할 수없는 바로 그 느낌!


살면서 난 사랑과 친절을 혼동하며 나에게 잘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존 할 수 밖 에 없었다. 맹목적으로 매달려야했는데 그것은 내안의 강한 융합욕구에서 나온 살기 위한 절규였다는 것, 그러다 그 사람의 작은 것에도 실망하게 되면 사소한 일 조차  감당이 되지 않아 내 일상생활이 온통 흔들렸고 그 후엔 어김없이 격노와 응징으로 보복하며 에너지를 소모해 기진맥진 했다는 것을... 


그동안 난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연을 잃었을까? 사실 지금 남은 사람은 없다. 가족이야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았어야겠지만...


평생을 도움 한 번 청하지 않고, 혼자 고립해 살아온 엄마처럼 살기 싫어 문 두드리며 버텨온 코헛 강의는 나에게 정말 삶의 다른 한편을 펼쳐 보여 주었다. 


무너진 내 과대자기가 무의식적으로 기대 할 수 밖에 없었던 숱한 나의 이상화 영웅들을 쫙 펼쳐 보여 주었으며, 그들을 내 안에 들이지 못하고 전부 파괴해야만 살수 있었던 안타깝고 불쌍한 나를 설명해 주었다.


어젯밤 꿈! 난 엄마의 상징이었던 하얀 면 속옷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또 커다란 덤프 트럭을 운전하며 질주도 하였다. 그래 내 삶의 주인공은 엄마가 아닌 바로 나!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먹기 싫은 것도, 알지 못했던 나! . 내속에 진정한 나는 엄마가 아닌 나란 걸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이젠 엄마가 배고플 때 먹는 식사가 아니에요. 난 이게 먹고 싶어요. 난 이게 하고 싶어요. 난 엄마가 아니에요!." 


진정 나를 애도 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던 코헛 강의를 마치며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나의 모든 문제를 쫙 펼쳐놓고 주름 펴듯 반듯하게 고쳐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럭저럭 조금씩 고립된 나를 세상 안으로 끌어드리며 작은 기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나를 정리해본다.               


     



2. '나의 자기애적 문제'                  -파랑님.


나에게는 다른 문제도 많지만, 리비도의 화살표가 나 자신에게로만 향하는 삶을 사는 자기애적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한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실상 내가 하는 것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이 기분나쁘면 물러났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슬며시 들어가보는, 그렇게 유연하게 반응하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기분을 즉시 파악해서 얼른 맞추는 행동이다. 


그러한 행동의 목적은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까봐  하는 두려움이다. ‘남의 기분을 맞추지 못하면 나는 내팽개쳐질 것이다, 좋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예.외.없.이., 실제의 나보다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다,’ 라는 ! 내머릿속의 굳건한 사고방식은 엄마와 나와의 관계 안에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에 이미 형성된 것이다.


나의 엄마는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알지 못한다. 엄마의 뱃속에 품고 있다가 낳아서 기른 자식이지만, 나는 엄마에게, 엄마를 닮지도 않은 딸이면서 또한 엄마의 분신이 되기를 바라는 모순된 요구의 대상이었다. 


나는 엄마와 너무 다른데, 모든 면에서 엄마의 요구대로 사느라 너무 너무 너무!!.  힘이 들었다. 어릴적부터 엄마가 원하는 친구들과 사귀어야 했고, 커서는 엄마가 원하는 대학을 가야했고,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좋은것이라 나에게 강요했으며,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다. 


지금도 엄마의 주장에 반박하며 그게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고 말하면 엄마는 금세 시무룩해지면서, 나에게 당한 배신을 절대 잊지 않고 몇 주 후에라도 반드시 눈빛으로 언어로 감정적 보복을 한다. '네가 틀렸고 엄마가 옳아' 라는 메시지를 주입하고 나서야 엄마는 안정을 찾는다. 엄마가 틀렸다는 것을 나의 엄마는 절대 인정 못한다. 그런 엄마가 답답해 죽을지경이다. 


엄마는 “친정보다 절대 잘살지 않되 자식에게 치대지 않도록 노후보장이 되어있는 집안의 전문직 남자” 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고 그런 남자를 찾아 결혼할 것을 나에게 주입시켰다. 그리고 엄마의 주선아래 그러한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나는 수도 없이 만나야만 했고, 그 중에 만나게 된 한 인연을 사랑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내가 한 일들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집세고 편집적이고 성격강한 엄마 밑에서 자란 여린 성격의 나는, 그저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의 새싹같은 생명력은 콱 밟혀 죽어버렸고, 엄마의 진정한 마음과 관심을 얻지 못한 나는, 내 관심의 화살표를, 내 리비도를, 대부분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다. 


실제 타고난 나는 부드럽고 온화하고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성정과 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엄마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바랬을 때 엄마가 그것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나라도 불쌍한 내 마음을 스스로 핥으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마는 엄마가 나에게 했던 일들을 모두 나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주장한다. 나는 엄마 밑에서 살면서 짓눌리고 깔려서 숨을 쉴 수가 없었는데,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나의 엄마에게는 딸이 숨은 쉬고 사는지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나보다.


엄마와, 그리고 타인과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마음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참된 나를 엄마에게 숨겼듯, 남들에게 좋게만 보이고 싶은 자기애적인 ‘나(거짓자기)’와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 ‘참된 나(참자기)’가 완벽하게 분열된, 깊은 모순 속에 빠진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힘들게 관계하며 살아왔던가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게 무섭고 수치스럽다. 


꼬마 시절에 자주 하던 종이인형놀이가 있다. 문방구에서 종이인형지를 한 장 사면, 그 종이에는금발머리 인형과 갈색머리 인형이 있는데, 금발머리 인형에게는 온갖 좋은 이름과 높은 귀족지위를 부여하고, 갖은 예쁜 옷들은 모두 그 인형에게 몰아준다. 


갈색머리 인형에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평범한 이름을 붙여주고 금발보다 한 단계 아래의 귀족지위를 부여하며, 파티복도, 평상복도, 잠옷도 금발보다 못한 것을 준다. 


그렇게 두 인형 사이에서 온갖 성격과 지위와 소유물에 나만의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애적으로) 모든것을 내맘대로 세심히 구분하여 쫙쫙 갈라놓고 나면, 그 작업을 해치운 것만으로도 그렇게 속이 시원~하고 재미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도 분열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확실히 구분해놓고, 통합되지 않은 상태가 불안한 나머지, 인형들을 통해 표현을 하고 풀어야 불안이 가라앉고 의식에서는 직성이 풀렸던 거 같다.


내가 자기분열이 심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꿈에서 나는 날개달린 말을 타고 날아다니는데 땅바닥에는 동물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다. 날개달린 말이 땅에 내려서는데 내가 탄 말은 동물의 사체를 절대로 밟지 않는다. 만약에 내가 탔던 말이 지저분한 것들을 밟기도 하고 닿기도 했다면 (내 몸에 닿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떻다고..) 나는 좋은 나와 나쁜 나를 조금은 통합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일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현실에서도 나는 엄마속을 때때로 헤집고 뒤집는 딸이다. 그런데 엄마한테 실컷 분풀이를 해놓고 나서 엄마가 분노하거나 속상해하면 “내가 뭘? 어쨌다고?” 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한 못된 행동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나는 ‘좋은 나’이고만 싶은데 ‘나의 못된 행동’은 잘 인정할 수가 없으니, 내 앞에서 펄펄 뛰는 엄마가 얼마나 속상한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아니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마음공부를 해가면 해갈수록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3. 영화 하녀를 보고...              -연두님.

나는 아직도 과제를 받으면 잘 잊어버리고, 다시 생각 날 때면 큰 부담을 느낀다. 글을 잘 못쓰면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못하느니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이 탄로 날까봐 겁을 내는 것이겠지."


얼마만에 영화를 보러 간 것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조조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그렇게 힘들게 생각했는지 후회했다.  


영화를 보면서, 사전에 영화에 대한 분석적인 이야기를 듣고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경계선에 관한 수업을 들을 때는 내가 '경계선 적'이라고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기애 구조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자기애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애적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애 적이라고 하기에는 경계 없는 행동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선보다는 자기애가 더 우위에 있다는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하녀 영화를 보고서 들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이 나에게 모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아니면 현재에도 하는 행동들... 수업에서 들었던 수많은 내용보다도 그냥 경계선과 자기애가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가 싫어했던 엄마의 경계선적인 모습들이 고스란히 나에게 들어와 있었다. 난 엄마보다는 낫다는 것에 조금은 위안을 얻으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자기대상' 없는 상태의 나는 끊임없이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혼자서 만의 공간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한다. 관계하는 법을 모르고 혼자서 만족할 만한 일들을 하는 것이다. 


하녀의 역할을 보면서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친구의 아이들을 일요일 마다 돌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엄마의 교회 친구분이 교회에 다녀올 시간 동안 약국의 한쪽에 있는 작은 방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늘 셔터가 내려져 갇혀 있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때이다.


우리집에 세를 들어서 살고 있던 소아마비 남자 친구도 초등학교때 같은 반을 하면서 4-5년 동안 도왔던 것 같다. 선생님들이 편하기 위해서 나에게 같은 반을 하게 하면서 여러 가지를 돕게 했던 것 같다.  엄마의 경계 없는 행동들에 나는 없는 것이다. 거르지 않고 말하는 나... 다른 사람도 존중하지 못하고 평가 절하하지만, 나 자신도 존중하지 못하는 나를 느낀다.  


    

    



4. SPACE, Space, space...              -노랑님.

관계를 하는데 있어서 늘 서툴렀던 나는 그 서툰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나 모든걸 잘 해내려  -잘 해내는것 처럼 보이려-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아왔나보다.


젊었을 때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진실된 나자신의 모습에 대한 감각을 둔하게 만든 채 모든 관계를 그럭 저럭 견딜 수 있는 정도로 자족하며 지내온 듯 하다.


그러나 가정이 생기고  내가 엄마라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자리에 서게 되었을때, 그것 역시 처음엔 그럭 저럭 견디다가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걷잡을 수 없는 관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나 하나만 견디는 것으로 버틸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결국 '나'란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관심이 시작되었다.


열 세가지나 되는 '병리적 과대 자기'의 유형을 들여다 보며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나자신의 모습들이 보이던지, 그런 나의모습으로 인해 가족 특히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것들로 인한 자괴감으로 인하여 괴로웠지만 그래도 나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은 조금씩이나마 달라지고 있는 듯 하다.


혼돈의 소용돌이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땐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타인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도 조금씩 거두게 되어가면서 이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분노했던  모습들이 있는 그대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나의 결함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젠 그것도 여유 있게 바라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긴것 같다. 내가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긴 새사람이 문제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그저 내가 이런 문제가 있고 남편이 저런 문제 가 있으니 저렇게 반응하는걸테고, 아이들 역시 각자가 소화되지 못한 부분들을 담고 있기에 불편해하고 서투르고 그런거구나라고. 


그 각각의 마음을 읽어보려는 노력만으로도 관계의 소통은 훨씬 수월해지는 듯하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확보한 기쁨이 무엇보다 크다.


영문을 쓸 때 경우에 따라 SPACE라고 쓰거나   Space  혹은 space라고 다양하게 쓰듯이 내 마음의 공간역시 틀에 박힌 하나의 모양새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flexible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도 생겨나기를 기대하며....






5. 코헛 강의를 듣고...                   -빨강님.   

나는 무엇이든 꾸준하게 할수가 없다. 글을 읽는 것 조차 건너 뛰고,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지 않고,  누군가 말을 하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그 결과 나는 시간 지키기. 기억하기가 늘 헤갈린다.

 

과거의 나를  만나러 가는 코헛강의를  한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나도 몰랐던  내가  곳곳에서  이름표를  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엄마는 다섯 아이중 섯째인 나를  일때문에 돌볼 수 없다고,  어린 고모에게  나를 돌보게 했다고  한다. 어린 고모는 나보다 열 두살이 많았고, 고모 엄마인 나의 할머니는 과부로 살다가 막내딸 고모를 다섯 살 때 버리고 집을 나갔다. 

 

어땠을까?... 주눅 들고, 엄마는 없고, 나를 돌보아야 했던 어린 고모 마음이...  언젠가 고모가  이런 말을 했다. 무조건 살기 위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엄마와 고모가 나에게 어떤  양육을 했는지 기억 할순 없지만...  난 여자이면서 여자가 싫다. 엄마가 사십대, 내가 이십대였을 때 엄마는 돌아가셨다. 그때 난 그닥 슬프지 않았다. 타인처럼 가엾고 안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할수 없는 내 상처... 혼돈스런  나!. 코헛 강의를 들으며 퍼즐 처럼 조금씩 나의 상처들이 맞춰졌다. 엄마로부터 전혀 거울 반응을  받지 못했던 나...  패닉 상태로  슬픈지, 기쁜지, 아픈지의 감정들을 느낄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나이지만 느낄수 없는 내 자신을,  가족이나 관계하는 그들에게 집어 넣고  그것이 나의 것인 줄도 모른채 그들의 모습이라고 우기면서 살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누구를  있는 그대로 절대 볼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쉽게 변할수 없는 뼈속 깊이 구조화된 지금 나의 모습...  코헛 강의를 듣고 돌아오면서 소리 치고 싶었다. 

 

"조금만 나좀 바라봐 주고,  조금만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야단치고 다시 달래서 마음을 좀 안아주지 엄~~~~~마!!!.  내가 이렇게 아파서 그 고통을 자식에게 전염시키고,  자신에게 공격하지 않게 말야. 나 .....사랑 받고 싶었어."  


내것을 빼앗는 그들,  내 부모...  늘 빼앗긴다고 느끼는 내구조, 박탈 받은 만큼  돌려 받겠어...  나와 관계하는 모두에게...  내가 필요한 거대한 이름표를 한 묶음 들고서...  안해주면  당신은 아웃이야. 이런 나를 보게된  코헛강의...

 

내가 잘 하면 버림 받지 않을 거고,  잘 하는 나를 너도 떠 날수 없겠지...  그들의 엄마가 되고자  들뜬 나... 그들을 옭아 매  영원히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으로... 하지만 결국 그들을 떠나라고 내몬 사람은 나. "이렇게 해줄 거면 가버려.  넌, 넌 내가 원하는 그런사람 아니야... 


지금 내 곁엔 결국 아무도 없다. 또래 친구도 언니도 .후배도.동료도...





6. 수업을 마치고...       -분홍님.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아저씨들이 자주 드나들었었는데 아저씨들이 사다주신 ‘과자선물세트’에 참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크고 나서 그것이 밖으로 나돌던 아빠를 붙잡고 싶었던 엄마의 회유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순진하고 자존심 센 엄마가 답답했을 것이고 엄마는 밖으로만 나도는 아빠가 원망스러웠을 신혼 초창기. 


계산해보니 결혼한 다음해에 내가 세상에 나왔으니 그 세상은 그리 따스한 느낌은 아니었겠지. 뭐 생후 초기에는 엄마가 전부라면 다행이지만 우리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낳았을 때 정말 행복했을까... 


엄마는 날 참 사랑해주셨다. 이쁜 것 입히고 이쁜 것 먹이며 키우셨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잘 먹고 잘 자고 말을 잘 들어 키우기 힘들지 않았단다. 반면 두 살 터울인 여동생은 내 기억에도 유난히 떼 부리고 많이 울었었다. 욕심이 많아 여동생이 어느 정도 크고선 늘 내 장난감을 뺏어 가서 엄마는 꼭, 똑같은 장난감을 두 개 사셨단다. 


때론 장난감을 뺏기며 아무 저항도 못한 나는 그냥 울어서 엄마는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단다. 집안에서 말 잘 듣는 착한 딸, 동생에게 뺏기고도 한 대 때리거나 못 뺏게 하지도 못한 딸은 커서도 내 것을 챙기지 못한다. 


넓은 오지랖은 나를 주변 사람들 속에서 평화의 파수꾼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지랖이 넓은 남자를 만났다. 나는 그의 오지랖을, 그는 나의 오지랖을 잡아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대부분 허용을 하고 만다. 고생을 하더라도 속이 편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7시 반에 여덟 명 정도 모여 함께 어딜 다녀왔었는데 토요일 저녁에 모임을 마치고 밤 11시에 마트를 가서 최대한 빨리 만들 수 있는 아침요깃거리를 위한 장을 보았다. 남편은 영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았지만 날 막지는 않았다. 그덕에 난 새벽 두시에 자서 여섯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웃긴 것은 날 제외한 일곱 명 중 두 명이 내가 무언가를 챙겨올 것이라 미리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나와 관계를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쓴웃음이 났다. 그들은 지금 내가 화가 나는 것을 이해할까... 


‘우와, 맛있겠다.’,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요?’, ‘어제 늦게 가서 피곤했을텐데 이렇게 준비해오다니 대단하세요.’, ‘신랑은 좋겠네. 음식 잘하는 부인 있어서..’. 예상했던 몇 개의 레퍼토리가 쏟아져나왔다. 물론 어제 이런 그림을 상상하며 난 그 고생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진정 그들을 위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 그런 것인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는 건 찬사를 받기 위해 고생을 한 내 모습이 부끄럽고 유치해서겠지? 남들에게 착하게 보이고 싶은 나, 싫은 소리 못하는 나. 내것도 못챙기는 내 모습은 어린 시절 외로운 엄마의 품 안에서 나라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첫째딸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엄마에게 그때 왜 내가 장난감을 동생에게 뺏겨서 우는 것을 보고만 있었냐고 하자 엄마는 나보고 동생을 때려도 된다고, 엄마가 지켜줄테니 동생을 이겨보라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못했다고 하였다. 그게 말이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엄마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엄마의 태도가 전부가 아니었겠지만 커서도 난 싫은 소리 못하고 상대의 의견에 동조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 정말 싫을 땐 관계를 철수하거나 상황에서 쑥 빠지는 것으로 나를 표현하는 미련한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물처럼 세모그릇에 담기면 세모모양이 되고, 별모양에 담기면 별모양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조화로워보이지만 진정한 나의 모양을 찾지 못한 채... 





7. 코헛강의를 마치고...    -주황님.


나의 엄마는 나의 딸이 태어나기 전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임신상태에서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진정한 애도도 나는 할 수 없음이 아닐까.


그전까지 나는 엄마에게 거의 모든 걸 맞춘 딸이었다. 어렸을때부터 난 무언가를 요구해본적이 없다. 요구하지 않고 순한아이...가 나를 칭찬하는 말이기 때문에 엄마에게 인정받고 변덕스러운 엄마를 맞추기 위해 '내 자신의 요구'에 관심을 가져본적이 없는 것 같다. 


상상계에 살고 있던 엄마는 하루에도 여러 번 희망에 들떠 얘기하다가 갑자기 돌변하며 한숨을 내쉬어 어린 자식들을 불안하게 했고, 엄마의 장단에 맞추지 못하는 자식은 심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 결국 자기대상의 구조화가 되지 못한 나는 엄마와 비슷하게도 상상계에 살고있음을 강의를 통해 알고 충격을 받았다.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조금만 노력하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저절로 내 불편한 상황을 변화시키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무엇이 엄마를 그렇게 모순된 존재로 만들었을까...엄마는 상처가 될만한 친정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아버지와 시댁에만 화살을 돌려 결국 자식들도 타자로 만들어버렸다. 한 번은 외가에 대한 않좋은 얘기를 하고 나중에는 그런 얘기를 한적이 없다는 분열된 태도를 보여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가장 의지하고싶은 존재는 왜 그리 나를 밀어냈던 걸까...


이러한 엄마와의 관계를 나는 직장에서도 재현하여 까닭없이 우상화한 선배에게 배신을 당해 너무나 실망하고 표면적인 관계만 하게 되었다.


강의를 듣고 나서 보니 배신이라기 보다는 엄마의 특성을 가진 대상을 찾고, 나의 유아적인 특성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한편으론 엄마의 모순을 참지 못해 현실인식과 경계가 희박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도 원인이었다는걸 깨달았다.


지금도 나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다. 그 동안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도 못하고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가 되려하면 불편한 행동을 하여 상대와 멀어지곤 했다. 조그만 실수로 상대를 폄하하고, 잘해주면 애써 그것을 무시하여 무화시킴으로써 관계를 끊곤 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엄마가 되자 나는 너무도 당황하게 되었다. 나에게 끊임없이 보살핌을 원하는 어린 딸을 보고 엄마를 떠올리게 되었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너무도 미숙한 나를 느껴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나는 홀로되신 아버지, 언니, 시댁과 관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엄마의 비판을 받으셨던 아버지, 엄마에게 반항하여 엄마와 관계가 좋지못했던 언니는 까닭없이 나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타인같이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씩 노력을 하지만 한번도 아버지와 언니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엄마와 나는 철저히 융합되어 나는 엄마가 되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음이 아닐까...


또한 시댁과는 까닭없는 피해의식으로 관계를 피하고 있다. 계속 끊임없이 요구를 하여 나를 결국 고갈시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서고 나의 희박한 현실감과 경계없음을 알기에 나의 생활이 시댁과의 관계로 무너질까봐 너무 두렵기때문이다.


사실 이번 과제도 나에게는 피하고 싶은 어려움이었다. 자기 표현이 금지되었던 경험이 결국은 자기 성찰도 어렵게 만들었나 보다. 코헛강의에 공감을 하고 있음에도 잦은 지각과 결석으로 모순된 태도를 보였던 나.


그래도 한 발자국은 과거보다 내딛었다고 믿고 싶다.






8. 수업후기.     - 검정님.


“공감을 받고 컸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생님의 질문에 머릿속이 멈춰버렸다. 그날 처음으로 이제껏 내가 받아온 것이 “공감”이 아니라 “동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이상적'이라고 일컫는 가족이 바로 나의 가족이다. 도덕교과서 같은 나의 부모님은 생전 싸우시는 법도, 자식에게 큰 소리 치는 법도 없으셨다. '부모는 자식의 본보기가 되어야한다'시며 어린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훌륭한 모습을 늘 보여주셨다. 


유아기를 외가에서 보낸 나로서는 이렇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딸이고 싶었고, 그 가족 안에 들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상처를 받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며 내 스스로를 보호할 수 밖에 없는 아이였었다는 사실을 지워버렸다. 언니, 오빠의 엄마가 나의 엄마라고 믿어버렸다. 그들이 경험하고 믿는 똑같은 엄마를 나도 가졌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정말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엄마가 사랑하기 손색없는 딸이 되기위해 모든 것을 스스로 빈틈없이 해내는 아이로 자라고자 노력했고, 엄마는 내가 원했던 관심과 칭찬과 사랑을 주는 대신 더욱 더 나를 방치하고서도 안심하게 되었다. 


난 늘 ‘한번만 날 봐주면 더 멋지게 해낼 텐데’하고 아쉬워했던 것이 기억난다. 엄마로부터의 보살핌이 없었던 난, 나를 지키기 위해 도덕성과 합리성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입게 되었나보다. 


엄마가 나를 공감해 주지 않았기에 나도 남을 공감할 수가 없다.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옳고 좋은 것’과 ‘그르고 나쁜 것’으로 나누고 나의 방어체계인 부모님으로부터 새겨진 도덕교과서를 읊어댄다. 그것이 거짓자기라는 것도 모른 채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하기에 스스로를 꾹꾹 누르고 남에게 맞춰가며 속으론 마음에 그들을 단칼에 베어버릴 계획을 했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조차도 거짓으로 똘똘 뭉친 “훌륭한 나”에게 용납될 수가 없어 지쳐버렸을 때 이 곳에 왔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또 동시에 예전엔 분명했던 모든 것이 모호하고 복잡해진다. 하나씩 나를 대면할수록 앞으로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주저앉고 싶다. 그러나 내 안의 참자기는 끝까지 가라고 한다. 그 끝에는 지금보다는 건강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가 보다.  


요즘 난 수업과 상담을 통해서 난 내가 머릿속으로 가졌었다고 꿈꿨던 것과 실제로 주어졌던 것들을 하나씩 확인해가고 있다. 하지만 만나게 되는 '과거의 어린 나'는 너무 힘들어 보여서 마음이 아프다. 한 번 찍소리도 못해보고 고단한 삶을 겪어낸 그 애를 따뜻하게 안고선 수고했다고 토닥거려주고 싶다.





9. 수업후기  -녹색님.


안타까움과 분노와 처참함을 느끼게 했던 엄마였지만 엄마는 나에게 생존의 울타리였다. 난 30대가 넘어서도 엄마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의존하며 독립하지 않았다. 난 엄마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를 철저히 이용했다. 죄책감 없이 오히려 엄마의 죄책감을 이용해 살았었다. 


 “니가 좋은 것들을 줘도 뱉어버리곤 했다. 그 비싼 용도 지어 억지로 먹였는데 다 토해냈다.”는 엄마의 말을 많이 들었었다. 내가 참 까탈스러운 아이였구나 싶었는데 강의 중에 “상상계 엄마는 아이에게 좋은 먹거리를 주었는데 아이가 안 먹으면 사랑을 주지 않는다. 자기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으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난 가슴 한켠에서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공허감의 정체일까 싶다. 엄마를 소유하고 싶었던 간절함이 채워지지 않아 느끼는 그런....


나는 어려서부터 지나친 자위행위를 했다. 지금도 전철을 타고 가다가도 앞에 선 남자의 그곳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있는 나를 본다. 그런 내 모습이 잃어버린 엄마를 되찾으려는 시도라는 강의에 난 깜짝 놀랬다. 하고 나면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 수많은 나날들... 그 만큼 나는 엄마를 찾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또한 성애화가 의존하고 싶은 마음과 살아 있다는 자기위로 기능이라는 것도 가슴으로 다가왔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니 오히려 나에게 자위행위나 성애화가 죽음과도 같았던 삶을 살아내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그것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어린 나를 느껴본다. 그리고 신앞에 고해성사를 하듯 정죄했던 내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병리적 자기애를 공부하면서 그동안 내가 그 무엇도 내것으로 배울 수 없었던 것이 나의 오만함 때문이며,  내가 왜 그동안 쭉 과식을 했는지도 엄마에 대한 적개심과 좌절이였구나를 알게 되었다. 새벽 잠결에 먹는 나의 모습도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식탐이 있는 나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장 크게 나를 들여다 보게 해준 시기심! 나는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정신분석을 받아서 잘나고 싶었다. 나는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현실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신도 믿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그 어느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심한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정직할 수 없었다. 

   




10. 완벽한 나의 이상형 '트와이라잇'   -남색님.

조각 같은 얼굴, 완벽한 몸매, 박식한 두뇌, 그리고 멋진 집과 최고급 승용차!  정말 어느 한곳 나무랄 데 없이 perfact  그 자체인 에드워드!  무엇보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한 여자에게만 꽂혀있다. 벨라....가 바로 그녀다. 에드워드는 말한다. 수백년을 기다리며 살아온 이유가 바로 그녀였고, 첫 눈에 그런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고...


야구선수인 새 아빠와 엄마를 배려하여 여주인공 벨라가  친 아빠에게 옮겨 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고등학교 첫 등교 날 생물시간에 짝이 된 에드워드와 처음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경련을 일으키며 그녀를 피하지만 곧 이상한 괴력으로 그녀를 차사고로부터 구출하는 등...이상한 행동을 하여 그녀의 환심과 의심을 사게 된다.


그러다 그녀는 그가 뱀파이어임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강한 융합적인 사랑을 하고 난 후여서 아무런 문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끌리는 운명의 힘을 느낀다. 에드워드 역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며 벨라를 가족에게 인사시킨다. 벨라는 그의 뱀파이어 가족사 - 그들은 '인간의 피'를 빨지 않는 GOOD 뱀파이어 였다는것... -를 알게 되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곧 다른 무리의 뱀파이어와의 대립이 일어나고 벨라가 다칠 위협에 처하게 되자 필사적으로 에드워드는 벨라를 위해 싸우고 그녀를 지킨다. 마지막 장면... 학교의 댄스파티에서 벨라는 에드워드에게 자기를 뱀파이어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에드워드는 살짝~거절하며 끝이 난다.  




난 한 눈에 영화 속 벨라처럼 뱀파이어 에드워드에게 압도당해버렸고 그의 사랑을 갈망하고 독점하고픈 욕망으로 가득 차버렸다. 에드워드는 벨라와의 융합을 이상적으로 꿈꾸지만 뱀파이어로서 벨라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하며 그가 지닐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녀 옆을 지킨다. 하지만 벨라는 무조건의 '원초적인 융합관계'를 맺으려한다.


벨라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철없는 엄마와 그다지 소통하지 못하며 자라게 된다. 벨라는 어릴적 엄마의 사랑을 흠뻑 받을 시기에 외롭고 우울한 엄마를 경험했고, 부모의 이혼 후 건강한 아버지와 관계 해보지 못해 이상화에 실패한 나의 모습과 흡사하다. 


절대적 사랑을 열망한 그녀의 욕구는 에드워드에게 박혔고, 나 역시 영화 속 그에게 압도당해버렸다. 정말 '완벽한 그'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 도무지 연결 될 수 없는 세상 밖의 창조물인 것이다(뱀파이어는 '구강괴물'로 유년기 좋았던 아버지를 이상화한 이미지와 자신을 섬세하고 튼튼하게 지원해주지 못한 부정적인 엄마 그리고  그 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나쁜 아버지상이 아닐까).


난 늘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세상 속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관계하지 못하고 늘 극적인 관계만을 추구해왔다. 또 사랑과 이상화를 헷갈리며 엄마 아빠에게 받아보지 못한 무조건적 사랑을 아무에게나 요구했었다. 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대방은 나에게 시달리고 관계는 어김없이 끝이 나버렸다. 결국은 나는 내가 만들고 파괴시키는 다른 사람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받아본적 없는 사랑을 질투하고 갈망하는- '못된 아이'였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벨라는 누구도 흠 잡을 수없는 완벽한 캐릭터 에드워드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강한 융합 관계를 요구하는데 '자기'를 포기하면서 완벽하지만 초능력 뱀파이어가 되기를 갈망한다. 


나 또한 어릴 적 부모에게 받아 본적 없는 무조건적 사랑과 보호를 아무에게나 받고 싶어 하며, 그들에게 그냥 속 하고 싶은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경계를 알 수 없는- 나의 부끄러운 융합적 요구들이 솟아오르고 벨라처럼 흡혈귀임에도 상관없이 뱀파이어 세계로 마냥 이끌려버렸다. 


현실의 나와 만나지 못하는 나의 '거대한 과대자기'는 트와잇라잇을 보며 꿈틀거렸고 나의 자기애적 문제를 충격적으로 건드려 한 동안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아직도 이 영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고 아찔하다. 


모순적이고 경계 없는 환경안에서 무엇이 제대로인지 판단 할 수 없었고, 보통으로 평범한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나는 때론 영화 속 벨라를 질투하기도 하면서... 내가 그녀로 그녀를 나로 착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