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편 (위니컷반 공동과제)
이 영화는 전쟁을 피해 엄마의 부탁으로 커크 교수님댁에 맡겨진 피터, 에드먼드, 수잔, 루시 이 네 아이들이 나니아에서 펼치는 환상속 모험이야기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환상영역에 들어가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무의식적 욕망'들을 마음껏 펼쳐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옷장 속 (나니아) 세계는 엄마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안전한 환상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집안사람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장소이다. 그래서 나니아는 옷장 안에 숨겨저 있다.
옷장 속에서 만져지는 천들은 부드러운 감촉으로 인해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중간대상의 상징이다. 나니아에 발을 딛는 순간 순백색의 설경과 흰 눈을 바라본 루시의 황홀하고 신비로운 느낌은 그가 무심결에 무의식적 환상계에 폭 들어왔음을 뜻한다.
루시가 만난 툼누스는 중간대상이 친구로 변형된 것이다. 루시는 나니아에 사는 동물인 툼누스와의 관계를 통해 불만족스러웠던 형제관계를 개선하고 친구와 좋은 관계 경험을 함으로써 자기치유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발달해나간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엄마가 아이들을 시골의 '이곳'으로 보낸 것이라는 장면설정은 부모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이다. '전쟁'은 현실에서의 섬뜩한 좌절 상황과 더불어 부모의 관심과 돌봄에서 멀어질 지 모른다는 아이들의 유기공포가 담겨있다.
'하얀 마녀'가 예언을 막기 위해 이들을 죽일 거라는 영화 속 이야기는 사실은 아이들이 자신을 버린 부모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투사되어 박해환상으로 출현한 것이다.
부모의 버림은 아이들에겐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므로 이에 압도당할 경우 정신이 '분열'되거나 정신증이 생길 위험이 높다. 그래서 '전쟁으로 버려진' 네 아이들이 현실을 온전히 버텨내기 위해 택한 방어 방법은 '부모가 자신들을 돌보기 힘들어 버리고 싶어 한다'를 '하얀 마녀가 자신들을 죽이고자 한다'로 바꾸고 이를 현실이라 믿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버려지거나 외면당하는 현실은 나니아의 겨울처럼 차갑고 춥고 어둡다.
나니아에 사는 하얀 마녀는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엄마의 나쁜 점을 상징한다. 대상항상성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에 얼음처럼 차갑고 무서운 하얀 마녀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젠 죽어~" 라고 외치는 마녀의 음성은 왜 그리 초조해 보이는 걸까? 거기에는 참다운 승리의 기쁨이 없고 오히려 불안만 더하다. 아슬란을 죽이고도 성이 차지 않는 마녀, 그녀의 통제할 수 없는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삶의 흐름을 끊어놓고 상대를 꼼작 못하게 마비시키고 창으로 찌르고도그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는 그녀의 잔인함에 소름이 끼친다.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녀에게는 오열하는 분노로 꽉 차있고 질식할 것 같은 냉기와 포악함만 존재한다.
휘두르는 칼날에 모든 것이 멈추고 굳어버리는 통제 불능의 광폭함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것이 바로 좋은 감정들에서 온통 마비된 엄마의 Demon Lover Complex 다.
반면에 사자인 아슬란은 좋은 엄마다. 사자는 사납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네 아이들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영화 속 설정처럼 책임있고 든든한 엄마의 상징이다. 하얀 마녀에게 당해 얼어붙은 나니아인들을 살리는 아슬란의 방법인 '입김을 불어 넣는' 행위는 '엄마의 따스한 숨결을 잊지마~'라 속삭이는 듯 좋은 대상항상성을 연상시키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아슬란을 따르는 무리들과 하얀 마녀를 추종하는 무리들과의 전쟁은 영화 스토리처럼 겉으로는 예언을 막으려는 하얀 마녀의 욕망을 보여주지만 속으로는 엄마와 자유롭게 분리되면서도 연결되는 중간 영역에서 벌이는 환상을 나타낸다.
긴장되는 이 '전쟁' 덕분에 아이들은 궁극적으로 창조성을 키울 수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의 환상영역이 살아있으면 견디기 힘든 현실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건강한 발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경우 아이들은 증오와 박해불안이 심해진다. 이를 완화시키고 분노와 충동을 길들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전쟁과 같은 도전을 끊임없이 받는 것이다. 특히 맏형인 피터에게 나니아인들과 동물들이 '너 없인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아슬란과 같은 왕으로서의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다.
이는 피터가 좋은 대상항상성 경험으로 인해 엄마의 나쁜 점을 상징하는 마녀를 물리치고 좋은 엄마에 대한 '감정의 질'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피터는 부모의 좋고-나쁜 모습들을 통합하여 전체성을 얻고 현실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건강한 아이이다.
피터가 내리 꽂은 칼, 강인함과 냉철함 그리고 분별력은 혼란스러울 때 맏이가 맡아야 하는 강박적인 모습일 것이다. 동생에게 모범이 되어야만 하고 부모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흐트러짐과 반듯하지 않음과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않아야만 하는 정확함에 대한 강박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둘째 에드먼드는 좋은 대상항상성 경험이 부족하여 하얀 마녀의 유혹에 넘어가 혼자만 마녀에게 찾아가고 형제들의 위치를 밀고하게 된다. 에드먼드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우스꽝스럽고 큰 모피를 입는데 어쩜 외롭고 고독한 자신의 소외된 모습을 숨기는 것은 아닐까? 에드먼드는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또 무엇을 그렇듯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아마도 그건 엄마였을 것이다. 연약하고 여리고 쉽게 설득당하는 그 마음 한구석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 사랑을 독식하고 싶어하는 결핍이 있다. 에드먼드가 혼신을 다해 찾아 들어간 하얀 마녀의 집은 따스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상상된 엄마의 자궁 내지 몸이다. 그러나 그가 본것은 따뜻함이 전혀없는 얼음궁전!.
늘 형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구는 얼음마녀 집의 빈 왕의 의자에 앉으면서 여전히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을 보여주는데 안쓰럽게 느껴진다. 마녀가 "과자 때문에 널 고발했다."라는 말에서 에드먼드가 마녀를 찾아간 건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 맞춰주는 따뜻한 엄마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마녀의 다그침과 성냄과 냉랭함은 그를 다시 한 번 절망하게 한다. 에드먼드의 방황하는 모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마비)이다. 마녀가 좋은 대상이 아님을 알고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잘못을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하고 변명과 고자질로 자신을 방어하는 어리석은 에드먼드는 비난받고 질책 받음이 무서워 중립이라는 번듯한 구실로 순종을 한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미 지난 일이야! 그리고 그 일로 더 이상 에드먼드를 힘들게 하지마라!" 라는 너그러움은 불안을 녹여주는 말이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때 우리는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질책과 꾸중과 다그침, 분노의 폭발없이 온화하고 다정할 수 있다면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텐데...
나니아의 예언은 아담의 혈육이 왕좌에 앉는 순간 하얀 마녀를 없애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예언을 막고 나니아를 차지하려는 마녀는 늑대를 풀어 나머지 형제들을 쫓는 가운데 100년 동안 얼어 붙은 강을 건너게 된다.
'100년 간 언 강'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아마도 부모를 죽이고 싶은 아이들의 무의식적 분노가 꽁꽁 억압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다. 얼음이 녹으면서 강바닥이 갈라지고 무서운 늑대가 쫓아오는 상황은 오랫동안 억압된 방어기제가 풀리려는 무섭고 두려운 심리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피터가 끝까지 칼을 들고 늑대와 맞설 수 있었던 힘 또한 좋은 대상항상성 경험으로 인해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는 나쁜 엄마에 대한 감정으로 압도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늑대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그들을 도와준 커크 교수님은 좋은 아버지상을 상징한다. 교수는 루시에게는 특효약을, 수잔에겐 활과 어디서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뿔을, 피터에겐 칼과 방패를 선물한다. 좋은 아버지상을 갖고 있는 이들 셋과 달리 에드먼드는 선물을 받지 못한다. 좋은 아버지상을 내면화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에드먼드가 삐딱하게 말하는 것이나 형제들을 배신한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렵게 강을 건넌 나니아에는 어느덧 봄이 찾아오고 얼음은 녹고 날씨는 따뜻해졌다. 봄이 나타내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시련을 이겨낸 아이들에겐 이제 힘든 현실도 견뎌내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쁜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살만하다고 여기고 좋은 기억을 불러올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편 (위니컷반 공동과제)
이 영화는 전쟁을 피해 엄마의 부탁으로 커크 교수님댁에 맡겨진 피터, 에드먼드, 수잔, 루시 이 네 아이들이 나니아에서 펼치는 환상속 모험이야기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환상영역에 들어가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무의식적 욕망'들을 마음껏 펼쳐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옷장 속 (나니아) 세계는 엄마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안전한 환상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집안사람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장소이다. 그래서 나니아는 옷장 안에 숨겨저 있다.
옷장 속에서 만져지는 천들은 부드러운 감촉으로 인해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중간대상의 상징이다. 나니아에 발을 딛는 순간 순백색의 설경과 흰 눈을 바라본 루시의 황홀하고 신비로운 느낌은 그가 무심결에 무의식적 환상계에 폭 들어왔음을 뜻한다.
루시가 만난 툼누스는 중간대상이 친구로 변형된 것이다. 루시는 나니아에 사는 동물인 툼누스와의 관계를 통해 불만족스러웠던 형제관계를 개선하고 친구와 좋은 관계 경험을 함으로써 자기치유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발달해나간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엄마가 아이들을 시골의 '이곳'으로 보낸 것이라는 장면설정은 부모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이다. '전쟁'은 현실에서의 섬뜩한 좌절 상황과 더불어 부모의 관심과 돌봄에서 멀어질 지 모른다는 아이들의 유기공포가 담겨있다.
'하얀 마녀'가 예언을 막기 위해 이들을 죽일 거라는 영화 속 이야기는 사실은 아이들이 자신을 버린 부모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투사되어 박해환상으로 출현한 것이다.
부모의 버림은 아이들에겐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므로 이에 압도당할 경우 정신이 '분열'되거나 정신증이 생길 위험이 높다. 그래서 '전쟁으로 버려진' 네 아이들이 현실을 온전히 버텨내기 위해 택한 방어 방법은 '부모가 자신들을 돌보기 힘들어 버리고 싶어 한다'를 '하얀 마녀가 자신들을 죽이고자 한다'로 바꾸고 이를 현실이라 믿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버려지거나 외면당하는 현실은 나니아의 겨울처럼 차갑고 춥고 어둡다.
나니아에 사는 하얀 마녀는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엄마의 나쁜 점을 상징한다. 대상항상성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에 얼음처럼 차갑고 무서운 하얀 마녀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젠 죽어~" 라고 외치는 마녀의 음성은 왜 그리 초조해 보이는 걸까? 거기에는 참다운 승리의 기쁨이 없고 오히려 불안만 더하다. 아슬란을 죽이고도 성이 차지 않는 마녀, 그녀의 통제할 수 없는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삶의 흐름을 끊어놓고 상대를 꼼작 못하게 마비시키고 창으로 찌르고도그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는 그녀의 잔인함에 소름이 끼친다.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녀에게는 오열하는 분노로 꽉 차있고 질식할 것 같은 냉기와 포악함만 존재한다.
휘두르는 칼날에 모든 것이 멈추고 굳어버리는 통제 불능의 광폭함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것이 바로 좋은 감정들에서 온통 마비된 엄마의 Demon Lover Complex 다.
반면에 사자인 아슬란은 좋은 엄마다. 사자는 사납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네 아이들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영화 속 설정처럼 책임있고 든든한 엄마의 상징이다. 하얀 마녀에게 당해 얼어붙은 나니아인들을 살리는 아슬란의 방법인 '입김을 불어 넣는' 행위는 '엄마의 따스한 숨결을 잊지마~'라 속삭이는 듯 좋은 대상항상성을 연상시키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아슬란을 따르는 무리들과 하얀 마녀를 추종하는 무리들과의 전쟁은 영화 스토리처럼 겉으로는 예언을 막으려는 하얀 마녀의 욕망을 보여주지만 속으로는 엄마와 자유롭게 분리되면서도 연결되는 중간 영역에서 벌이는 환상을 나타낸다.
긴장되는 이 '전쟁' 덕분에 아이들은 궁극적으로 창조성을 키울 수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의 환상영역이 살아있으면 견디기 힘든 현실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건강한 발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경우 아이들은 증오와 박해불안이 심해진다. 이를 완화시키고 분노와 충동을 길들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전쟁과 같은 도전을 끊임없이 받는 것이다. 특히 맏형인 피터에게 나니아인들과 동물들이 '너 없인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아슬란과 같은 왕으로서의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다.
이는 피터가 좋은 대상항상성 경험으로 인해 엄마의 나쁜 점을 상징하는 마녀를 물리치고 좋은 엄마에 대한 '감정의 질'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피터는 부모의 좋고-나쁜 모습들을 통합하여 전체성을 얻고 현실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건강한 아이이다.
피터가 내리 꽂은 칼, 강인함과 냉철함 그리고 분별력은 혼란스러울 때 맏이가 맡아야 하는 강박적인 모습일 것이다. 동생에게 모범이 되어야만 하고 부모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흐트러짐과 반듯하지 않음과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않아야만 하는 정확함에 대한 강박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둘째 에드먼드는 좋은 대상항상성 경험이 부족하여 하얀 마녀의 유혹에 넘어가 혼자만 마녀에게 찾아가고 형제들의 위치를 밀고하게 된다. 에드먼드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우스꽝스럽고 큰 모피를 입는데 어쩜 외롭고 고독한 자신의 소외된 모습을 숨기는 것은 아닐까? 에드먼드는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또 무엇을 그렇듯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아마도 그건 엄마였을 것이다. 연약하고 여리고 쉽게 설득당하는 그 마음 한구석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 사랑을 독식하고 싶어하는 결핍이 있다. 에드먼드가 혼신을 다해 찾아 들어간 하얀 마녀의 집은 따스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상상된 엄마의 자궁 내지 몸이다. 그러나 그가 본것은 따뜻함이 전혀없는 얼음궁전!.
늘 형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구는 얼음마녀 집의 빈 왕의 의자에 앉으면서 여전히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을 보여주는데 안쓰럽게 느껴진다. 마녀가 "과자 때문에 널 고발했다."라는 말에서 에드먼드가 마녀를 찾아간 건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 맞춰주는 따뜻한 엄마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마녀의 다그침과 성냄과 냉랭함은 그를 다시 한 번 절망하게 한다. 에드먼드의 방황하는 모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마비)이다. 마녀가 좋은 대상이 아님을 알고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잘못을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하고 변명과 고자질로 자신을 방어하는 어리석은 에드먼드는 비난받고 질책 받음이 무서워 중립이라는 번듯한 구실로 순종을 한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미 지난 일이야! 그리고 그 일로 더 이상 에드먼드를 힘들게 하지마라!" 라는 너그러움은 불안을 녹여주는 말이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때 우리는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질책과 꾸중과 다그침, 분노의 폭발없이 온화하고 다정할 수 있다면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텐데...
나니아의 예언은 아담의 혈육이 왕좌에 앉는 순간 하얀 마녀를 없애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예언을 막고 나니아를 차지하려는 마녀는 늑대를 풀어 나머지 형제들을 쫓는 가운데 100년 동안 얼어 붙은 강을 건너게 된다.
'100년 간 언 강'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아마도 부모를 죽이고 싶은 아이들의 무의식적 분노가 꽁꽁 억압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다. 얼음이 녹으면서 강바닥이 갈라지고 무서운 늑대가 쫓아오는 상황은 오랫동안 억압된 방어기제가 풀리려는 무섭고 두려운 심리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피터가 끝까지 칼을 들고 늑대와 맞설 수 있었던 힘 또한 좋은 대상항상성 경험으로 인해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는 나쁜 엄마에 대한 감정으로 압도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늑대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그들을 도와준 커크 교수님은 좋은 아버지상을 상징한다. 교수는 루시에게는 특효약을, 수잔에겐 활과 어디서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뿔을, 피터에겐 칼과 방패를 선물한다. 좋은 아버지상을 갖고 있는 이들 셋과 달리 에드먼드는 선물을 받지 못한다. 좋은 아버지상을 내면화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에드먼드가 삐딱하게 말하는 것이나 형제들을 배신한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렵게 강을 건넌 나니아에는 어느덧 봄이 찾아오고 얼음은 녹고 날씨는 따뜻해졌다. 봄이 나타내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시련을 이겨낸 아이들에겐 이제 힘든 현실도 견뎌내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쁜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살만하다고 여기고 좋은 기억을 불러올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