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후기

위니컷 클래스융합

 

도널드 위니캇 1부 수업을 마치며...



1. '마더' 영화를 보고. - 수선화님 


아들과 어머니 두 모자가 사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한약재를 팔고, 침술 자격없이 사람들에게 침을 노면서 돈을 벌며 살아간다. 아들의 어린 시절, 그녀는 사는게 너무 힘들어 아들에게 약을 먹이고 자살을 시도했었다. 박카스에 쥐약을 타서 아들에게 먹게하고 자신도 먹었지만 미수에 그쳤다. 


"기억을 떠올리려면 옆머리 부분을 비벼!". 

아들이 기억을 물어본다. "어릴 때 나 죽이려고 했지. 왜 나한테 엄마보다 먼저 약 먹으라고 했어?. 아들은 엄마를 무서워하며 옆에 오지 말라고 한다.


엄마는 깜짝 놀라 당황한다.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상처를 전부 알고 기억하는 아들에게 그녀는 대답한다. “너와 나는 한 몸인데, 나 없이 너 혼자 어떻게 살 수 있겠니?”. 마치 아들이 자신의 일부라고 인식하는 엄마. 


"누가 너에게 바보라고 하면 절대 참지마". 

"생각이 힘들 때는 망각 할 수 있는 침을 내가 알고 있다".


그녀는 왜곡된 자신의 생각을 아들에게 그대로 밀어 넣는다. 결국 바보라고 하면 참지말라는 그녀의 가르침때문에, 아들은 사람을 죽인다. 아들이 무죄라고 증거를 찾던중, 아들이 범인으로 밝혀진 상황에서도 그녀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말한 목격자도 죽여버린다.



엄마의 왜곡으로 결국 그 자식이 바보가 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게 된다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였다. 정신분석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그저 모성애을 자극하는 하나의 눈물어린 영화라고 생각 했을 텐데... 


그녀는 자식을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결국 그녀가 볼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그녀의 왜곡으로 그 아들은 영원한 유아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처럼 나도 평생 모르고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니캇 수업을 통해 나는 이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녀와 참 많이 닮아서 슬펐고, 내 아들이 그녀의 아들과 닮아서 더 많이 슬펐다. 


나는 아주 많이 그녀처럼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두렵다. 도움을 청하는 것도 도움을 받는 것도 힘이 든다. 살아가면서 나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도 않고, 기다려서 배우지 못하고, 뭐든지 내 방식으로 왜곡해버린다.


“엄마 저 아저씨 우리 싫어 하나봐”. 그녀는 대답한다. “아냐 저 아저씨가 유명해서 아주 바쁜 사람이라 그래”. 유아적인 아들과 현실을 잘 알지 못해 왜곡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와 너무 닮아서 목이 메어 왔다. 나도 내 아이에게 많은 왜곡을 퍼부었다. 내 아이가 스스로 배 울수 없도록, 내 망령 같은 왜곡은 지금도 꿈틀 꿈틀 끊임없이 튀어 나온다. 



아이는 엄마에게 충분히 의존하고 융합하고, 본능을 보호받으며 자라난다. 엄마 자신이 좋은 공생 경험을 못했다면, 자신의 아이도 충분한 의존을 할 수 있는 공생을 놓치게 되고 그 결과 엄마와 분리를 통해 사회적 인격체로 발달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 나 좀 살려줘!. 내 아이가 소리치는 것 같다. 아니 내가 소리 친다. 내가 소리 치고 싶은데, 내 아이가 치고 싶은 거라 느끼는 나를 인정한다. 영화 속 마더가 내 엄마이고, 그와 닮은 나도 영화 속 마더이다.





2. 영화 <마더>를 보고 느낀 융합욕구 -백합님


엄마는 아들을 자기와 다른 하나의 인격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은 반드시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고, 엄마의 보호아래 있어야 하고, 자칫 잘못되었을 경우의 책임도 엄마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엄마가 그럴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아들의 목숨마저 엄마가 알아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자라지만 눈이 너무 예쁜 아들과 함께 사는 엄마는 어느 날 아들이 살인 용의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자 아들이 누명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진짜 살인자를 잡아서 아들을 감옥에서 빼내겠다고 결심한다. 


얼핏 지극한 모성에 관객은 안타까움과 함께 공감하지만, 사실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 “내 아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전부다. 그 확신은 사실, “내 아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뿐이고 나아가 “내가 노력하면 내 아들은 그런 사람이 안 될 수 있다”는 착각일 뿐이었다. 


‘진짜 살인자’을 찾는 과정은 지방의 소읍에서 작은 약재상을 하는 엄마에게 결코 녹록치 않다. 때로는 아들 같은 놈에게 강간이라도 당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욕을 들으며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그나마 모아놓은 돈도 다 쏟아 부어야 했다. 아들의 누명을 벗길 수만 있다면, 아들을 다시 품 안으로 데려올 수 있다면 엄마는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다. 


엄마가 아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통찰이 빠진 자기 욕망의 주입과 그 욕망에 대한 확신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면회를 올 때마다 기억을 해보라며 애절하게 요구하는 엄마의 말을 따라 사건 당시 일을 조금씩 얘기해준다. 그러는 과정에서 “골프장 주차장의 벤츠의 백밀러를 깨트린 건 내가 아닌 진구”였다는 진실도, “엄마가 나한테 약을 먹이고 죽이려고 했잖아!”라는 묵은 원한도 기억해낸다. 


마침내 엄마는 아들의 입을 통해 ‘진짜 살인자’라고 확신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엄마는 ‘진짜 살인자’를 잡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진짜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진짜 살인범의 진실을 결코 받아들을 수 없었던 엄마는 이번에는 ‘진짜 살인범을 구해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엄마의 아들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아들이 감옥에 들어간다. 엄마는 그 아들한테도 면회를 간다. 엄마는 그 아들에게 “너는 엄마가 없니?”라고 물으며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것은 죄 없이 감옥에 가게 된 엄마 없는 아들과 그렇게 누명을 벗겨주고자 했던 자신의 아들과 빗나간 모정(융합욕구)으로 자신마저 살인자가 되고 만 엄마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후회, 한탄과 참회가 섞인 울음이었다. 


아들이 석방되는 날 엄마는 가게 안에서, 언제나 아들이 서 있었던 가게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마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를 생각하는 듯하다. 아들의 친구들이 마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불타버린 고물상에 들른다. 아들은 그곳에서 늘 엄마가 가지고 다니던 ‘침통’을 발견하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건넨다. 


아들의 손에 들린 침통을 보고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은 엄마의 살인을 폭로하는 결정적인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침통을 건네는 아들의 눈빛은 마치 “다 알고 있어. 엄마와 나는 공범이야”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엄마의 융합욕구가 빚어낸 일종의 재앙을 볼 수 있다. 바보아들과 홀어머니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거칠고 무서운 곳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융합은 자연스러워 보였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모정’이라고 포장하기를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직접적으로 다른 두 사람에게 재앙을 주었고, 앞으로 당사자인 엄마와 아들에게는 공황과도 같은 혼돈을 초래할 것이다.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이기는 하지만, 자식에게 혼자 살아갈 힘을 주지 않고, 언제나 부모의 눈으로 아들의 세계를 해석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면 나중에는 서로 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3. 꿈은 나이다! . -장미님


꿈은, 정직하다. 꿈은, 보여준다. 수업을 들으면서 꿈을 꾸었다. 3개월 된 아기가 소녀를 엄마로 두고 있다. 소녀의 젖도 아닌, 보모의 젖을 먹는다. 

그런데 아기가 말을 한다. ‘차가워’


꼼속에서 관찰자인 나는 그 월령의 아이가 말을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엄마인 소녀에게 묻는다. 이 아이가 차갑다고 한 거 맞냐고.. 소녀는 맞다고 대답한다.



엄마의 젖이 차갑다니.. 어른조차 불쾌할 상황인데 정신적 방어벽이 없는 어린 아기는 엄청난 모욕을 받은 셈이다. 꿈속의 그 아기는 바로 나였다. 그러나 나는 꿈을 꾸고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이렇듯, 현실에서는 나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고 무감각의 상태를 많이 겪는 나 자신이다. 나를 위로했던 대상의 경험이 없는 것이다.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무서운, 무감각한 사람이다. 자식이 원하는 바를 알아채고 처리해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식이 원하는 바가 엄마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 스스로 원하는 것들이 많아 그것을 자식들에게 주입하고 살며, 뜻하는 바대로 100%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고 싶다고 괴로워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다. 강남에 대형 아파트들을 보유하고 남들보다 넉넉한 연금수입을 가진 고위공무원 남편, 명문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 아들에, 엄마가 원하는 대학을 졸업해서 전문직 사위와 결혼해 강남에 자가아파트를 소유하고 사는 딸.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불만이다. 


엄마의 친구들은 모두 엄마를 부러워하지만 엄마는 가족에게 인생을 끝맺고 싶다고 얘기하며 가족들을 절망스럽게 한다. 남편이나 자식들이 100% 엄마의 기준대로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엄마는 그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기준과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엄마는 기함한다. 


특히 맏딸인 나를 엄마는 만만하게 생각하며 엄마 정신안의 나쁜 것들을 많이 물려준 듯하다. 나는 엄마와 기질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엄마는 나를 붙잡고 나를 발밑에 두고 나를 통제하며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뒤돌아서서 나를 미워하고 욕한다. 


엄마와 융합했다가 분리해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공생과 융합의 욕구는 엄청나다. 몸은 어른이지만 공생의 욕구가 대단하여 현실에서 친밀한 사람들과 적당한 관계를 맺는 것이 힘들다. 다툼이 있었던 사람과도 불안하여 관계회복을 금방 하고 싶어지고, 다툼이 있는 상태로 그대로를 견디는 일조차 잘 하지 못한다. 


‘엄마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대상항상성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타인과의 관계에 나쁜 것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회복이 어렵고, 우울과 불안과 짜증의 상태에 있더라도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금방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나는 '경계선'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자아이질적인 사고를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 사실은 나에게 수치스럽게 다가온다. 소외감과 정서적 외로움은 나에게 너무나 큰 아픔이다. 타인과 정신적으로 접촉하기가 어려우며 ‘나를 주고 상대를 받는’ 진정한 관계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 공부를 시작한 나는 이제는 엄마와 분리되어서 살고 싶다. 때로는 엄마를 내 방식대로 이용해보고도 싶고, 나의 생활에 책임을 지고 싶다. 무시무시한 엄마에게서 벗어나 숨쉬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





4. 위니캇 1부를 마치며... -튜울립님


내가 생각해봐도 이상할 정도로 요즘 때때로 민감해지고, 가슴이 철렁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는 내 모습을 많이 느낀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 몇 초 동안 스쳐가는 것에 수많은 감정들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무엇이라 정의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나의 모습... 그저 나이가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심한 정도이다. 


더 행복해지고, 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발을 들여놓은 위니캇 수업은 작은 상자에 이것저것 쑤셔 넣듯 아무 공간이 없이 내 머리를 채웠으나 어느새 내 가슴으로 들어온 듯하다. 세상에서 머리와 가슴의 거리가 가장 멀다더니.... 몇 달이 지나고 1부 종강을 앞둔 지금, 어쩌면 난 그 긴 길 가운데 서있는 것만 같다. 


퇴행이란 이름도 붙이지 않는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수용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나를 통제하는 나를 외면하고 싶다. 진정한 자유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막내동생.........................

나와 남동생은 열 살 차이이다. 막내동생은 아들이라기보단 늦둥이여서 온식구들의 관심을 받고 자라났다. 난 유난히 나와 많이 닮은 막내동생을 좋아하였고 동생을 돌보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였다. 게다가 난 아기를 좋아하여 장래희망이 초등학교 교사 또는 유치원교사였다. 막내동생과 여덟 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도 동생을 무척 예뻐하였다. 


막내가 순하고 우리를 잘 따랐기 때문에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같은 동네에서 엄마가 미용실 문을 닫을 때까지 막내동생을 봐주는 집으로 가서 함께 놀곤 하였다. 방학이면 엄마는 우리가 학원을 가는 시간에만 막내동생을 봐주는 집으로 보내고, 우리집에서 우리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였다. 


자연스럽게 기저귀 가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양육은 물론, 모유떼기, 용변가리기 등의 많은 양육과제들이 (어쩌면 엄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여동생과 나의 공동과제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이터울 많은 형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여동생과 내가 다툼이 일어나면 난 막내를 데리고 여동생과 분리된 환경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것은 여동생과 말다툼을 한 후 내가 막내를 업고 놀이터에 가서 기분이 풀릴 때까지 막내가 미끄럼틀 타는 것을 봐주고 과자를 먹고 온 일이다. 내 기억에 여동생은 그렇게 행동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막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중학교를 들어간 이후에도 나의 ‘양육’은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막내가 남자아이여서 자칫 삐뚤어질까봐 꽤 조바심내며 혹여나 나쁜 친구들을 만날까, 밖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사춘기 때 반항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엄마가 외출하는 날이면 우리는 집에서 막내를 지키는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끼니 때 되면 밥 차려주고, 밖에 나가면 나쁜 친구 만날 수도 있으니 못나가게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가셨다. 내 친구들은 같이 어울려 다니는데 나와 여동생은 막내를 위해 엄마가 집에 없는 날은 모든 약속을 취소하여야 했다. 


내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나이에도 남자 아이 그렇게 집안에 가둬서 키우면 안된다고 엄마를 설득해보기도 하였으나(실질적 이유는 물론 나의 사생활을 위해서였다) 엄마는 ‘남자라서’ 그렇다며 우리 모두를 잡아두었다. 꽤 억울해했던 기억이 난다. 


난 7살때부터 계란후라이를 할 수 있었는데, 여동생은 예닐곱살 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엄마가 없다고 한참 울었던 적이 있었고, 막내는 열 살이 넘어서도 우리의 보호가 필요하다니... 난 꽤 독립적으로 성장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를 의존하고, 의존하게 만드는 동생들과 엄마가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막내가 군대 가기 전에 막내의 여친과 함께 놀러왔었다. 나는 바쁜 와중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내려고 하였고, 막내의 여친에게도 꽤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그들에게 밥을 사주거나 용돈을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해 내심 미안하였다. 


그런데 며칠 간의 모습 동안 눈에 들어오는 여러 행동들이 있었다. 막내와 막내의 여친과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 메뉴를 정하라고 막내에게 문자를 보내자, 패밀리 레스토랑과 같이 분위기 좋고 고상한 곳을 좋아하던 막내가 고기 먹고 싶다고 답문이 온 것이다. 좀 의아했지만 그냥 넘겼는데 다음에는 아웃백 어떠냐고 물어보자, 여친이 아웃백 한번도 안가봤다고 하는 것이다. 삼겹살집도, 아웃백도 결국엔 여친이 가고 싶은 곳이었단 사실을 안 순간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이 세상에서 나를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막내의 초점이 여친에게 가 있는 것을 보며 무척 화가 난 것을 이성에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정의하지 못하고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던 것같다. 


게다가 여친에게 선물로 줄거라고 테디베어 웨딩 세트를 사는데 역시 화가 올라왔다. 결혼할 사이도 아니면서 이런 거 왜 사냐는 둥, 인형을 사줄 거면 차라리 유용한 테디베어와 컵 세트를 사라고 했다. 결국 막내는 자기 뜻대로 웨딩 세트를 샀다. 난 엄마가 알면 서운해할테니 선물해준 거 비밀로 하라고 하였다. 


입대가 낼모레인데 데이트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가는 동생에게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제 식구는, 아니 나는 안중에도 없구나 싶었다. 내가 시골에 부모님 뵈러 가면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던 막내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무조건 시간을 내서 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여친 만나느라 안 온 거겠지, 


이제 알바한 돈은 모두 여친에게 쏟아붓겠지, 여친 있으니 부모와 누나들은 신경도 안쓰네, 엄마아빠는 전보다 빨리 늙어가시는데 이제 함께할 시간이 많지도 않은데.... 이제 가족은 안중에도 없구나.... 나는 그 여친이 미워질 정도로 막내를 향한 서운함이 올라오고 있었다. 


희한한 것은 정작 엄마와 여동생은 나처럼 서운하고 화가 나긴 했지만 막내의 여친이 미워질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당하였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원망이었다. 그리고 내가 막내에게 밀착되어 있었던 만큼 막내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내 손을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느끼는 분노였다. 


하지만 나는 부모가 아닌 누나, 즉 형제였기에 그 모든 것은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막내에게 나의 서운한 마음은 꼭꼭 감추고 엄마아빠가 너 이러는 줄 알면 얼마나 서운해하시겠냐고 돌려서 말할 정도로 나의 이성이 또한 나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를 사랑하였지만 사랑의 이름으로 나의 기질을 바꾸고 싶어하였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잘 계획해주지 못해 본인의 능력을 다 펼쳐보지 못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셨고, 처녀 적에 엄마가 좀 더 여우같았더라면 엄마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사셨다. 


그래서 잔머리가 잘 돌아가고 처세술에 능한 여동생은 이뻐하였지만 곰처럼 둔하고 많은 생각에 잠겨 행동이 빠르지 못한 나를 자주 타박하셨다. 게다가 나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감수하는 성향이었던 반면 여동생은 욕심이 많고 세상이치에 능해 야무져보였다. 


엄마는 나를 보며 답답해하셨다. 아마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후회들이 밀려와 더욱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렸고 여동생과 엄마로부터 분리되었단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에리히 프롬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며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와 기질이 비슷한 막내에게 그렇게 강한 밀착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엄마가 나에게 그러했듯이 막내를 통제하고 내가 원하는 동생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서글픈 기억이지만 막내와의 관계로 인해 나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아직 해결해야할 많은 과업들이 있을테고 그 중엔 내가 죽을 때까지도 끝내지 못할 것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솔직해지고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내 스스로 나를 통제하지 않도록 하며 다가가고 싶다. 할 수 있는 만큼.... 





5. 수업을 마치며... 맨드라미님

매주 수업을 들으면서 어떤 날은 눈물이, 또 어떤 날은 소화불량의 체증으로 넉다운되기도 했다. 내 안에 무엇이 나를 이렇게 하는걸까...?


나의 건강하지 못함이 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까를 생각하면 어린 딸이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가 상상이 되면서 가슴이 아파온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아이가 크는 내내, 진정 아이와 소통하면서 살았나? 아이를 그 존재 자체로 인정하였나?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되돌아보면 아이의 15년에는 나만 있었다. 철저히 나를 중심으로, 내 감정대로 아이를 대했다. 나에게 절대적 의존을 하는 아이에게 나의 불안을 전염시켰으며, 내 감정을 아이에게도 강요하였다. 내가 아이에게 자행했던 횡포가... 미안해!...


나는 아이와 융합되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아이도 원해야 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아이도 가야 했으며, 내가 슬프면 아이도 슬퍼야 했다. 나와 아이가 한 몸이어야 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침범하고 경계가 없었는지...아이는 나에게 끊임없이 외쳤을 것이다, 엄마, 나는 나야. 


결국 내가 불안해서 아이를 붙잡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이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온전하게 공감할 수 없었다. 융합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철저한 고립이 아닐까? 너와 내가 한 몸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각각의 존재가 아득한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과제를 하는 지금도 체증으로 몸을 가눌 수 없다. 내 안에 도대체 몇 겹의 방어막이 쳐져 있기에 이런 반응이 생기는 걸까?





6. 수업을 마치며... 수국님

나는 좋은 엄마 컴플렉스가 있다. 아니 좋은 사람 컴플렉스가 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우며, 남들도 나를 그렇게 봐주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한 느낌을 상대에게서 받았을 때의 괴로움은 잠을 못 이룰 정도이다. 나는 항상 그런 대접을 받으려고 필요한 최선의 노력을 했고 자격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소위 명문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중이던 남편을 만나 홀시어머니가 계신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되면서 27년동안 쌓아온 나의 자아와 존존감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자식의 명문대 졸업을 인생의 성공으로 생각하는 시어머니는 항상 옳아야 했고, 자신의 잘못은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재자였고, 나는 항상 옳지 않아야 했다.


홀시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보상의 책임이 나에게 있는 냥, 나는 무조건 순종하며 분란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눈물로 살았다. 왜냐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 갈수록 자아는 없어지고, 늘 시어머니앞에서 가식적으로 위장하고 사는 나를 느끼며 결혼생활의 의미도, 세상의 즐거움도 잃고 우울해져갔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웃으며 행복한데 나만 어두운 감옥에 갇혀 질식해가고 있으며, 다들 그런 나를 비웃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완벽주의적인 나의 성격은 아이에 대해서, 엄마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전전긍긍했다. 큰 아이는 시어머니와의 권력구조에서 힘을 뺴앗기지 않으려 갈등을 겪어가며 지키려고 애썼고, 작은 아이때는 그런 갈등에 지쳐 시어머니가 하자는대로 아이를 내맡기며 부딪치는 것을 회피하였다. 


그런 집안분위기 속에서 항상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곧두세우고 사는 엄마의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자라온 아이들의 마음속에, 편안한 엄마가 자리잡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큰 아이는 내성적이고 차분하며 나름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강해서 어느정도 견디어 준 것 같은데, 여리고 예민한 작은 아이는 할머니에게 내어준 엄마의 자리에서 엄마를 갈망하며 대상항상성이나 전능경험의 기회를 잃었던 것 같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감정처리가 잘 안되고, 책과 레고에 집착하는 유년시절 이후 고학년이 되면서 왕따처지가 되어 심한 자아상실을 겪게 되었다. 


아이에게 있어 엄마는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되어져 있었다. 좋은 엄마여야하고, 완벽한 사람이어야하는 나에게 그것은 삶 전부가 부정당하는 죽음의 순간이었다. 부모교육을 받으면서 나의 강박관념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위로 연년생의 오빠와 2년 터울의 여동생과 3남매인 나는 어려서부터 착하고 생각 깊은 기쁨을 주는 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한 아들손자 다음으로 태어난 몸약한 여자아기가 부족한 엄마 젖을 오빠에게 주고 암죽을 먹으며,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오빠에게 뒤쳐지지 않고, 엄마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몸부림친 결과였고, 그것은 나의 깊은 욕망과 엄마에 대한 사랑의 욕구를 억누른 참자기가 아닌 거짓자기의 삶이었음을 깨달았다. 


결혼 후 엄마와의 강박적 유대는 어쩔 수 없이 끊어졌지만 시어머니와의 새로운 관계로 재구성되어져 거짓자기의 탈은 더욱 더 견고해졌다. 


작은 아이의 일을 겪어내면서 나는 튼튼하지 못한 엄마였음을 자책하며 아이를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 마음을 쏟아부었고, 이제 어느정도 울타리로서 엄마의 자리를 되찾고 있으며 아이와 함께 웃을 수 있다. 


완벽하게 백점만 받는 인생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이제는 시어머니의 다름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며 80점만 받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가 좀 더 어렸을 때 이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이제라도 아이의 문제가 드러남은 엄마의 실패를 교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음에 감사한다. 


좋은 배우자의 역할이 상처받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으므로 남편에게도 감사하다. 남편은 이 수업을 받은 이후로 내가 훨씬 편안해졌다고 한다.




7. 수업을 마치고... 라일락님


부모교육을 들은 어느 월요일 밤 나는 왜 울고 있는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눌러놓았던 기억들이 연쇄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의식적인 사고를 하였는지, 그것이 아픈 사실이었다기보다는 ‘그래 그럴 수 있지’라는 반응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의 강요에 의해 결혼을 하였는데 아빠와 엄마의 기질이 너무 달라 아빠가 엄마를 많이 무시하였다고 한다. 나를 가졌을 때 엄마는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빠가 엄마를 의심하여 내가 아빠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빠를 가장 닮은 것도 나였고 결정적으로 아빠의 못생긴 엄지손가락을 닮은 아이는 형제들 중 나밖에 없었다. 또 세 살 정도 되었을 때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나를 낯모르는 이에게 주었고 쉴 새 없이 울어서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떠한 이유였든 거부당한 존재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존재에 대한 슬픔이 밀려왔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아기들이 우는 울음을 울어 이렇게까지 아파할일이었나 하며 놀라기도 하였고 한편으로 애도할 수 있는 이 상황에 감사했다.


엄마는 양육환경에서 나를 지켜주기보다는 방관한쪽이 더 큰 것 같다. 기질상 나는 예민한데 비해 엄마는 무심하거나 거칠었고 엄마에게 깊은 감정이나 생각 따위를 표현하면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공부에 대한 강요를 받아본 적도 없고 숙제를 했는지 확인도 받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숙제를 안하고 매를 맞는 여자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그 수치심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위장하고 또 위장했던 기억이 난다.


예민한 편이었던 아빠는 나를 아무 때나 침범하고 휘둘렀으며 불안에 떨게 했다. 내 무의식에는 엄마와의 초기환경으로 인한 어려움도 있겠지만 아빠에 대한 어마어마한 원망과 분노가 숨겨져 있을 것이며 그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수업을 듣는 동안 엄마와의 생애초기 환경이 삶 전체와 그 일생을 지배한다는 내용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왔다. 극히 일부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론적으로는 많이 들어봤음에도 내 머릿속에 엄마와의 문제는 크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현실을 보아도 본 것이 아니었나보다. 


한때 ‘엄마는 날 사랑하지만 엄마가 나랑 달라서 그래’라고 이해했다. 이제는 그 이해 전에 아픔을 느끼고 진정 아파하며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몇주전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얼마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 이제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까, 아이 낳으면 괜찮아 질까? 자기는 나랑 운동도 같이 못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많은 이유들 때문에 못하고..’ 내가 남편에게 했던 수많은 거친 언어폭력과 신경질적인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와의 관계 안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남편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마음이 쓰라려왔다. 


수업내용을 남편에게 대략적으로 들려주면서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했고 너무나 미안하고.. 또 도와달라고 말했다.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해변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동안 내 뜻대로 하지 않는 남편이 얄미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묻어두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거칠게 대했나 보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아주 나중에 ‘나 좀 사랑해줘!!’라고 말한다. 


내가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에 통제하려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사람 그대로의 의견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절로 받아들여 내치는 말투나 행동으로 나타낸다. 열 번을 잘해줘도 한번 어긋나면 소용없어지는 나의 결핍된 대상항상성이 지각된다.


그땐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지금껏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보복 없이 나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더불어 언제나 시간약속과 규칙을 제시하여 가끔 마음이 무겁기도 하나 사랑도 함께 주시는 김은옥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나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하고 결심한다. 지금보다는 더 행복한 사람이 되어 미래의 내 아이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나게 해 줄 것이라고...




8. 수업을 마치고... 개나리님


엄마 찾아 삼만리...

남녀가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면 퇴행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내 입에선 징징대는 어린아이처럼 내 기대대로 상대가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생트집을 잡고... 책임도 모두 떠넘긴 채 내 필요를 당장 채워주지 않는다고 툭하면 삐져 있었다.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원하나? 무엇을 원하길래 결혼이후 그리도 많이 싸웠나 싶었는데.. 어느 날 ‘내가 참~ 말이 하고 싶고, 공감 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난 남편에게서 엄마에게서 못 받은 감정적 공감을 받고 싶어 했고, 내가 그 사람 삶의 일 순위가 되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 


나중에서야 ‘내가 상담자와 풀어가야 할 나의 외상적 필요를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구나’ 싶었고, 나의 자기중심적 성향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 엄마일 수 없고, 그가 내 상담자가 되어 줄 수 없다는 간단한 사실이 의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이 마음이 촉발이 되어 이곳에 오게 되었고, 공부도 시작하게 되었다.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중간대상에 대한 수업에서 “중간대상에서 실패해서 순수한 고통과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정말 깊게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우울증으로 그 감정에서 도피하려 잠을 하루 종일도 잤고, 많이 먹었고, 사춘기부터 30대 초반까지 삶의 고통을 모면해 보고자 종교생활에 심취 했었다. 


이제야 아주 조금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이 구분되지만, 난 그 누구도(심지어 나 자신 조차도) 믿지 못하기에 신도 믿지 못했다. “전능경험이 충족되어야(신이 되어야) 진짜 삶(사람)을 살 수 있다.”는 내용도 조금 이해가 되었다. 


신에게도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라며 간절히 울며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신도 나를 버려서 니가 누구지?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엄마에게 버림받았던 내가 신이 중간대상 역할을 해주어서 그나마 미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을까? 지금에서야 신을 진정으로 의존할 수 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다. 


난 그 누구보다도 신과 친밀해지고 싶었다. 아기 때 전능경험을 충분히 하고 적절한 좌절이 있어야 했는데 나의 부모는 나의 양육을 두고 기 싸움을 하셨다 한다. 7실 때 난 등교거부를 했다 한다. 엄마는 날 억지로라도 학교에 보내려 했고 아빠는 가기 싫어하는 내 편을 들며 못가게 했다 한다. 


싸우다 싸우다 학교 보내기를 포기 했고 난 결석이 많은 아이로 담임의 미움을 받았다. 그 싸움의 패턴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 되었다고 했다. 내 맘대로 등교거부하며 아빠의 술주정을 등에 엎고 난 엄마를 이기는 전능감에 기뻤을까? 난 혼란스러웠으리라. 


엄마에게도 버림받지 않아야 되고 아빠에게도 버림받지 않아야 되는 어린아이가 낮에는 생존하기위해 엄마편... 술이 있는 밤에는 아빠편...으로 살아가야 됐으니...말이다.


어쨌든 신뿐만이 아니라 난 가족 밖의 모든 대상에게 버림받을까봐 부정적 감정표현을 못했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가족에겐 밖에서 받은 모욕감과 분노를 속이 풀릴 때까지 퍼부어댔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우울감으로 무기력하고 게으르게 살아가기로 분노를 풀었다. 


뒤돌아보면 나는 좋아하는 대상이 있고, 친해지고 싶은 대상이 있어도 잘 못 다가가는 편이었다. 상대가 거절할까봐 짝사랑이 전문이고, 외현적 자기애자였던 엄마와 비슷한 정교수, 조목사, 친구 서00같은 착취적 인간관계를 10년 넘게 지속했다. 병리적인 엄마와의 관계를 나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대상만 바꾸어 반복하고 있었다.



분열

경계에 들어가는지 못 들어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공부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경계에 들어가는 것과 못 들어가는 것에 대한 내 자신의 경험적 무지인지, 도통 침범을 당하였고 침범도 했었는데 어디서부터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남인지에 대한 현실이 없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이것이 분열일까?분열이 분리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글자하나 차이인데 유아와 어른의 차이라니 말이다. 


공부하기 전에는 그저 내 속에 아이가 있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아이가 아니라 유아가 있는 듯 느껴진다.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디어서 의존대상인 남편이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있으면 서운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나는 내가 참 정직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일차적 사고에서 온 솔직함이라는 것도 배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배움도 내가 소화를 해야 내 것이 되는데 난 그냥 삼키기만 했다. 그것이 내사라는 것도 알았다. 엄마로부터 유기당하고 싫고 박해 당하기 싫고 하는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속의 그 유아는 아직도 배고파서 젖가슴을 삼킬량 젖을 흡수하듯이 그렇게 덩어리째 삼켰다. 


역사를 히스토리라 그러나? 나의 역사는 self일까? 자아가 취약하다는 게 이 말인가 싶다. 내가 없고 삼켜버린 외부대상만 있고 그 대상의 삶인 거짓 자기로 살고 그렇게 사느라... 아느척~ 잘난척~ 이쁜척~ 있는척~ ~척만 하는 거짓 삶을 연기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감이다. 짝짝짝!!!


내사와 더블어 나의 분열을 설명해줄 또 한 가지 지각대장!.... 난 제 시간에 간 적이 없는 지각대장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나중에 직장에서도 나의 지각은 쭉~ 이어졌다. 그 경계를 못 지켜서 나는 모욕과 무시를 당해야 했다. 


더 두 말고 들도 말고 딱 20분 지각! 그 스릴감과 긴장을 즐겼을까? 늦게 들어가면 주목받는 것으로 묘한 나르시즘을 즐겼을까? 조금이라도 내가 책임을 질 상황이 올라치면 난 잠으로 꾀병으로 도망을 쳤다. 그렇게 어린시절 받았던 모욕감과 무시를 반복해서 받을 수 있게 난 지각하기에 열중했다. 지각이 주는 만족이 있으니 그 오랜기간 반복됐겠지....


난 이번 숙제하기가 참 힘들었다. 엄마를 무시하며 만만하게 봤는데 실제적으로 숙제를 하며 다가온 엄마의 크기는 내가 down이 될만치 힘든 감정적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론 내가 경계선에 걸려있고 자기애에 걸려있고가 나무 자명한데 가슴으로 인정이 안되었나 싶고.... 아기가 눈가리고 아웅하듯이 나만 아니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를 것 같은 그래서 더 까발리기 싫은 마음도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경계선이든 자기애이든 인정을 하면 내가 내 자신을 책임져야 하니까 그 책임지기 싫어서 엄살피나 싶기도 하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니 확실한 경계선자가 맞다. 웃음이 나온다. 


내 속의 아이가 어떻든.... 내 무의식이 어떻든.... 지금 이순간 나는 나를 존중하며 나를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거짓자기가 사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서 언젠가 신 앞에 섰을 때 내 self로 나만의 삶을 신과 함께 살았노라고 고백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내가 사는 동안 엄마를 또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나로인해 상처를 받았을 그분들도 나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기도한다. 





9. 수업을 마치고... 해바라기님

어렸을때 유난히 거미를 무서워한 기억이 난다. 아무리 작은 거미라도 거미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거의 자지러지도록 공포를 느꼈다. 


수업을 듣고 나니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하늘 높이 폐허처럼 서 있는 정글짐. 딱딱하고 하얀 사기그릇 더미. 그리고 조잡하고 텅빈 휴대폰의 꿈들...


그리고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써도 떠오르는게 없다.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텅 빈 존재였던 것 같다. 



연년생 둘째딸로 태어나 반갑지 않은 존재였던 나는 무척 순해서 손이가지 않았다고 한다. 순하고 요구하지 않는 아이... 엄마가 나를 표현하던 얘기다. 


까다로왔던 언니에 비해 울지않고 떼쓰지 않았으니, 돌보지 않고 빈방에 그냥 두곤 했고, 그래서 당신이 편했노라고 아이는 그래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엄마는 그렇게 요구하지 않는 나를 칭찬했고 반갑지 않은 둘째 딸로 사랑받고 살기위해 나는 항상 엄마한데 순종했다. 


엄마는 자식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셨다. 당신이 기분 나쁘면 모두 침묵하고 비위를 맞춰야 했고 나 자신보다 당신이 나를 더 잘 안다고 하며 당신의 얘기만 거침없이 쏟아놓으셨다.


언니나 동생이 엄마와 틀린 자기 의견을 말하거나 서운한 점을 얘기하면 부모에게 잘잘못을 따지냐며 격노했다. 달리 의지하거나 사랑받지 못했던 나는 엄마와 나를 동일시하여 언니와 동생을 비난했다. 순종적이던 나에게 엄마는 그렇게 자리잡아 갔고 지금도 나는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내 자신이 중요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누군가 칭찬을 해도 불편했다. 위니캇 수업도, 상담도 아이의 문제가 불거져서 찾게 되었다. 나도 늘 우울하고 힘들었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수업을 듣다보니 holding이 실패되어 거짓 자기로 살고 있는 나 자신과 대상항상성이 없는 내 모습이 보인다.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키우려니 너무 당황스럽다. 모성신화들.. 저절로 생긴다는 아이에 대한 애정과 자연스러운 표현이 나에게는 생기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서 한 달도 되지 않아 아이가 많이 울자, 나는 어릴때 안울었다는데 쟤는 왜 저렇게 울까, 이상한 아이구나 하며 멍하게 오랬동안 바라봤던 기억도 난다.


어린 시절 행복했노라고 끊임없이 되뇌였던 기억은 쓸모 없어지고, 알 수 없는 불안과 분노로 아이에게 격노하고, 때로는 내 상처를 아이에게 투사하여 필요이상으로 아이를 과잉보호하느라 오락가락하고 있다.


텅 비어있고 마비된 나를 칭칭 묶은 엄마라는 줄기를 원망하면서도 나는 내 아이를 또 다른 나로 키워가는거 같아 공포스럽다. 아니, 사실은 내가 엄마가 필요해 엄마로 나를 묶은 건지도 모르겠다. 묶는다는 융합조차도 엄마가 나에게 준거 같지 않고 내가 손을 뻗어 끌어온것만 같다. 


내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뭔가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힘겹지만 건강한 보통의 엄마가 되기 위해, 세상을 느끼며 살기 위해 작은 걸음을 시작한다. 진정으로 따뜻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가지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